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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Apr 12. 2022

[건강일기] 내 몸을 학대하는 시간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며칠 전 읽은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다가 엉뚱한 부분에서 위안을 받았다. 평소 헬쓰라는 운동에 대하여 큰 매력을 못 느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헬쓰장이라는 공간이 우리의 몸을 억지스럽게 사용하는 일종의 육체의 사육장 같다는 표현을 읽으며 옳다쿠나 싶었다. 내가 헬쓰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명분을 얻었달까? 하지만 내가 근력이 생길 정도로 걷는 게 아니니 나의 근력은 어떻게 강화하는가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달부터 필라테스를 했고, 첫 시간은 그간 내가 요가 시간에 수련한 것보다 강도가 낮아서 본 운동에 앞선 스트레칭의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 두번째 수업을 들었는데 밴드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강도가 좀더 높아지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수업을 상기했을 때, 그리고 수강생들의 면면을 보았을 때 선생님께서 그리 높은 강도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 넘겨짚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운동은 서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렇게 서서 시작한 운동은 30분 내내 서서 밴드를 당겨가며 몸을 늘였다가 버티게 했다가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쉴 틈없이 했고 속으로 '이것이 헬쓰장에서 육체를 사육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헬쓰가 사육이라면 필라테스는 학대로다.' 중얼거리며 그래도 꾸역꾸역 동작을 다 따라했다. 강도가 강한 운동을 할수록 그 후의 뿌듯함은 커지는 지라 지난 번보다 오늘의 운동은 더욱 뿌듯했지만 걸어나오는 내 다리는 후들거리고 비틀거렸다. 


우리가 운동을 마치고 느끼는 그 뿌듯함이란 육체에서 오는 것일까 머리에서 오는 것일까 문득 궁금하다. 육체의 개운함은 요가를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거나 걷기를 하고 난 후에 근육이 풀리는 듯한 기분을 말하고, 머리의 개운함은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었을 때에 느껴지는 기분을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내 몸을 학대하는 시간'이라고 부른 필라테스를 한 50분이 가져온 뿌듯함은 어떨까? 일단 이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을 풀어낸 것 같은 가벼움이 그날 하루 들고 이후 며칠을 배나 다리가 얻어맞은 듯 아프니 육체의 개운함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 하지만 이 시간이 아니라면 내 몸을 이런 식으로는 몸을 쓰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몸을 썼구나 싶은 개운함이 있으니 결론적으론 육체의 개운함이 3이라면 머리의 개운함이 7 정도 되지 않을까? 무슨 운동을 하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가 묻는다면 나도 답이 없다. 


학대당한 내 몸에게 보상을 하고자 집에 가는 길을 한참 돌아서 걸어갔다. 3 : 7을 그래도 5 : 5 까지 올려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날은 무척 화창했고 봄꽃은 활짝 피었거나 피려고 하고 있었다. 벚꽃비를 맞으니 육체의 개운함이 1 올라갔고, 이름 모를 새를 관찰하는 눈과 귀와 발걸음에 또 1이 올라갔다. 그렇게 기어코 5를 채우고서야 집으로 들어가 기분좋게 샤워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래, 헬스장이든 필라테스든 어떤 운동이든 좋다. 육체의 개운함 아니라 머리의 개운함으로 10을 채운다해도 모두 0인 상태보단 나으리라. 그런데, 몸을 쓰려고 하는 움직임만으로는 어딘가 몸에게 미안하다. 사람의 몸이 단련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이 생각은 레베카 솔닛의 영향을 받아 더 강화되었다. 그렇게, 내 몸을 좀더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보상하는 일을 함께 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의 벚꽃과 이름 모를 새 덕분에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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