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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Aug 05. 2022

[육아일기] 학교 간 아이가 학교에 없다니

아침에 지각 문자를 드리고 10분 정도(5분에 더 가깝게) 아이를 늦게 교문에 데려다줬다. 지난주 결석한 수업이라 교실 바뀐 걸 모르고 갔다. 문자를 안 읽은 나의 1차 책임이 컸다. 당연히 등교를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교시간에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드리니 아이가 수업에 안 들어왔다고 안 오는 줄 알았다고....???? 가고 있다고 늦는다고 문자 확인하셨는데?

머리가 새하얘지고 어딘가에서 불안해 할 아이가 갑자기 너무 걱정이 되어 30여분을 온 학교와 주변을 찾아헤맸다. 평소 늦을 때 가 있으라고 했던 작은도서관이 유력했지만 거긴 10시에 열고 아들은 9시부터 헤맸을텐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가. 게다가 아이는 폰이 없고 내 폰은 배터리가 없어 너무 난감한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자기 변명에 급급했다. 나더러 전화를 하지 그랬냐는 말은 너무 황당했다. 교문까지 데려다준 아이가 사라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한단 말인가?


아이는 예상대로 작은도서관 주변에서 만났다.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모른다. 아이는 다행히 평온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교실이 잠겨서 밖에 나와 도서관에 갔는데 거기도 잠겨서 선생님이 늦는 걸 수도 있으니 다시 도전해보자고 다시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래도 잠겨서 이젠 포기하자고 도서관에 다시 왔단다. 그게 1시간 가까이 아이 혼자 판단하고 행동한 거다. 도서관에 시계도 없어서 속으로 300을 세고 나왔다고 한다. 엄마를 만날 거 같아서.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나는 아이처럼 울었고 아이는 어른처럼 안겼다.


아이가 요쿠르트차를 보더니 먹고 싶다고 하여 사려고 폰을 꺼내는데 폰이 없다. 아이를 찾은 대신 폰을 잃은 건가? 그래 폰을 잃는 게 낫지 하며 크게 속상하지 않았다. 학교와 주민센터에 연락처를 남기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요구르트를 사 마셨다. 지갑이 있어 요구르트를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크게 마음 졸이지 않았는데 폰도 되칮았다. 폰만 잃어버렸더라면 아마 난 꽤 종종댔을 텐데 아이를 잃어버리고 찾은 직후라 정말 아깝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비교할 만한 수준의 대상이 아니다.


퉁퉁 부은 눈, 흠뻑 젖은 옷, 벌렁대는 심장이 갑작스레 동시에 느껴지며 피로해졌다. 집에 와서 샤워를 마치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이를 한참 안고 있었다. 오늘 무언가를 하나 잃어버려야 하는 날이라면, 그것이 뭐든 간에 너희들만 아니라면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과후선생님의 문자가 와 있었다.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답을 보내며 수강취소를 요청했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하면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아이도 피곤했는지 안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네가 표현할 줄 몰라서 평온한 지도 모르지...아이가 그렇다는데 굳이 더 참여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안 오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기에 연락이 없는 아이가 안 오는 건 백번 이해해서 결석인가보다 생각할 수도 있다고 치자. 가고 있다는 아이가 안 왔는데 그런 줄도 모른다는 것과 처음 나를 마주할 때 변명만 늘어놓는 그 태도가 너무 무책임했다. 이런저런 말은 생략하고 '이래저래 헤어려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답도 같이 보냈다.


나는 선생이고 그러하기에 학부모인 지금도 그쪽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풋내기 교사 시절 교실에 들어오고 한참 지나서야 한 아이가 운동장에 있음을 확인한 적이 있다. 진짜 놀라서 계단을 뛰어내려가 데려온 적이 있다. 그때가 떠올랐다. 너무 미안했고 어디 나가지 않은 게 고마웠다. 그만큼 너무 정신이 없는 일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몇 번을 그 입장이 되어서 이해해보려다가 포기했다. 그건 이해받을 내용이 아니다. 그때의 나도 비난받아야 하고 지금의 그분도 비난받는 게 옳다. 지금 가고 있다는데 여기가 산 넘는 학교도 아니고 그걸 놓친다는 건 억지로라도 이해받을 일은 아니다. 앞으로 출석 문제에서만큼은 내가 그랬듯 강박처럼 체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다.


아이에게 다음엔 학교 내에선 교무실 가서 여쭤보고, 학교밖에선 도서관을 비롯한 안전한 곳에 도착한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하라고 교육했다. 이번에 보니 아이가 많이 자랐다. 의젓하게 대처해준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내가 엄마를 잃어버렸던 8살 무렵이 오버랩되며 여덟 살이면 엄마를 잃어버려도 제 스스로 찾는 법을 알기에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폰을 사줘야 하나 30초 갈등하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마주하지 않으면 가장 좋은 게 위기이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넘어가는 법을 하나씩 배우는 것도 의미있다. 아이는 그 산 하나를 잘 넘어왔다.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아이같이 우는 엄마가 딱했는지 냉수 한 컵을 떠다준다. 내 속에서 어째 이런 아이가 나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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