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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Sep 02. 2022

[생각일기] 가끔은 나도 신통하다

알약 랜섬웨어 오류 극복기

내가 어리버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얼마 전 브런치에서 쓴 교통카드 태그에 관한 것도 그렇고, 신발 짝짝이로 신고 출근하기, 휴대폰 대신 리모콘 들고 외출하기, 귀에 연필 꽂고 연필 찾기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 그나마 신은 공평하게도 나에게 남들보다 뛰어난 육감을 주었으니 남들은 나를 보고 촉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길도 발길 닿는대로 가다보면 목적지인 경우도 있고, 어릴 적엔 좀더 신통력이 좋아서 눈을 감고 있으면 시계가 떠올라 시간을 보여주는데 그게 오차 범위 5분 내외이곤 했다. 더 신기하게는 수학 시간에 주관식 답을 모를 때에도 눈을 감으면 숫자 몇 개가 떠올라 그 숫자들을 조합해서 답을 쓰곤 했는데 운이 좋으면 맞고 틀린 경우에도 2루트3을 3분의 2라고 적은 경우라 스스로도 무척 놀라곤 했다. 좀 무섭기도 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점을 보셨나 나는 비구니 팔자라 절 근처에도 가지 말랬는데 애 낳고 잘만 사니 그 점쟁이는 촉이 나보다도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래도 왠지 그 말이 설득력이 있어서 나의 신통력은 나만 알고 있기로 했다. 대학 때 잘 지내던 친구 커플의 이별을 농담처럼 예고하며 웃다 그날 이별을 당한 내 친구의 소식을 듣고는 꿈에서 본 내용은 더더욱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촉은 사라져 로또는 남들처럼 아깝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서른 개의 숫자 중에 한두 개 맞는 수준이니 내 촉은 돈 버는 재주는 나만큼이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간혹 촉이 발동할 때가 있다. 가령 지난 화요일 같은 경우이다. 평소라면 컴퓨터로 글 작업을 하고 그냥 저장하기만 누르고 말았을 텐데 그날따라 나답지 않게 철두철미하게 백업을 했다. 하드웨어에 저장도 여러 번 했지만 그것도 불안해서 구글로 메일을 보내두고, 구글문서로 복사해서 따로 백업도 해 두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휴대폰으로 확인까지 했다. 이유라면 그냥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좀 불안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오후에 컴퓨터가 먹통이 되고나서야 그 불안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에야 그것이 알약 랜섬웨어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이렇게 평안하게 "컴퓨터나 고쳐볼까? 안 되면 밀고!"의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백업 덕분이었다. 나 자신이 이토록 신통하고 기특할 수가 없었다. 백업을 생활화하는 부지런하고 꼼꼼한 사람은 모른다. 이렇게 글도 간헐적으로 쓰는 내가 백업이라니, 그것은 정말 어떤 위기에서나 발휘되는 행동이다. 그걸 내가 아무런 전조 증상없이 촉만으로 해냈다니! 덕분에 큰 걱정거리 하나는 던 셈이다. 


하지만 노트북은 고쳐야했기에 AS를 받기로 했다.  한 번 어리버리는 어디 가지 않는 듯, 코로나로 운영이 중단된 것도 모르고 AS센터까지 노트북을 이고지고 와서 도로 이고지고 가야한다. 길찾기 앱으로 가는 길만 확인했지 '방문 전 예약'하라는 문구는 흘려 본 것이다. AS센터 앞에서 전화로 기사님과 통화 후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인터넷을 뒤적여 따라해서 AS센터 건물 안에 있는 카페에서 해결했다. 그냥 집에서 해도 될 일을 굳이 이고지고 와서 밖에서 해결한 셈인데 그래도 해결을 했으면 됐지! 다행히 컴퓨터를 다 밀 필요도 없었고 굳이 백업을 안 해도 된 상황이었지만 초기화 가능성에도 대범하게 보낼 수 있었던 지난 며칠 간을 생각하자면 다시 생각해도 신통하다. 며칠 간 별 걱정없이 지낸 것이 새삼 무척 대단해보였다. 잘못하면 다 밀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기사님의 말을 듣고는 더더욱 든든해졌다. 아직 안 죽었군!


불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예민하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잘 웃고 잘 말하지만 그 반면 잘 못자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기도 하다. 똘똘해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좀 친해지면 빈틈이 많다고 하고 더 친해지면 은근히 예민하다는 말을 듣는다. 똘똘하지 않지만 똘똘해 보이는 건 좀 맘에 든다. 빈틈이 많은 것과 예민한 것은 사실이기에 또 수긍한다. 종교는 없지만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세상만사를 만들 때 균형을 맞추었으리라 믿고 있다. 균형교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사람이 하나의 모습일리는 없고 때로는 자기 비하에 빠지고 비관적이게 되지만 때로는 사람좋은 태도로 의지를 활활 태우기도 한다. 커피는 쓰지만 맛이 있고, 재즈는 어둡지만 따뜻하다. 나는 어리버리하지만 똘똘한 면도 있고 신통방통한 면도 있다. 오늘 노트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어제까지 나는 어떤 죄책감과 무능함과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노트북 문제 하나 해결하고는 며칠 전의 신통함까지 꺼내서 나를 채운다. 간밤의 악몽이 아직도 선명한데 깨어난 삶은 또 어찌어찌 신통하게 굴러간다. 가끔의 신통함만 있어도 이렇게 나는 나를 굴러가게 한다. 그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좋다. 남들이 보기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간밤의 나와 아침의 나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나는 안다. 시시각각 삶을 에민하게 받아들이는 나에게 이런 가끔의 기분 좋은 감정이 얼마나 큰 토닥임이 되는지. 


오늘 책 한 권을 읽고 있는데 그 책에 담긴 삶들이 너무 힘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끔 나타난 기분 좋은 힘으로 더 굳세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항상 신통방통한 사람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삶이 가끔 신통한 일을 해내는 사람의 삶보다 더 아름답다고는 말을 못 할 것 같다. 삶은 원래 살기 힘든 것이고 그 어려운 것을 우리가 해내는 중이며 삶의 아름다움은 그 해내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걱정과 불안은 나를 이 세계와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작은 기분 좋은 일 한 가지가 나를 이 세계에 붙여놓았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나도 신통하다! 그걸 믿고 가는 거다. 언젠가 또 내가 지칠 때 신통함이 나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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