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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Oct 11. 2022

[여행일기] 짧은 여행, 춘천

  처음 춘천에 닿았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시골서 나고 자라 도시의 붐빔을 겪은 적이 없는 내게도 춘천이라는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달라 보였다. 너무나 쾌적했고 고요했다. 상가가 양쪽에 늘어선 걸로 보아 분명 중심가인데 널찍하게 뻗은 도로와 인도에는 쓰레기 하나 소음 하나 없었다. 그때의 풍경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처럼 눈 안쪽에 박혀있다. 그렇게 시골 마을의 소란스러움도 도시의 복잡함도 없는 도시, 바닥에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함과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차가움이 있는 도시 춘천에 스무살의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대학 생활이 얼마나 심심했는지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않기로 하자. 다만, 그때에도 나는 늘 춘천이 맘에 들었다.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에 간판이 떨어져 내린다고도 했고, 여름이면 그 매서운 바람마저 그리워진다는 2계절이 뚜렷한 도시였지만 나는 춘천이 좋았다. 상수원보호지역이라 공장이 설 수 없어 일자리가 없어 물가도 서울보다 비싸다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점이 좋았다. 그래서 공장이 없었구나? 그래서 내 첫 느낌이 쾌적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무척 빈곤한 상태였는데도 물가가 비싸면 덜 사면 되겠지 하며 춘천을 좋아했다. 당장은 어려워도 인생 후반부엔 꼭 춘천에 와서 살아야겠다는 꿈을 꿨다. 


  춘천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런 사람과 당장 춘천에서 삶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결혼을 하고도 대학원을 핑계로 춘천을 드나들었다. 대학원마저 끝이 난 후에는 가끔의 여행만으로 춘천을 방문한다. 춘천에서 살고 싶었는데 춘천을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첫 핑계는 "닭갈비가 먹고 싶다."였다. 닭갈비를 먹기 위해 세 식구가 춘천을 몇 번이고 방문했다. 닭갈비는 맛있었고 춘천의 풍경은 아름다워 가족모두 갈 때마다 좋아했다. 다만, 올라오는 길이 너무 막힌다는 점이 운전하는 이의 불만이었다. 그래서 더 자주 가자고 말하지 못했다. 또 다른 핑계는 '추억'이었다. 대학 친구들과 우리가 청춘을 보낸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기도 했고 아들에게 엄마의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는데 후자는 확실히 핑계가 맞았다. 그래도 대중교통으로 올 수도 있어서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아들과 집에 머문 남편 모두가 만족한 여행이었다. 여행은 떠난 사람도 떠나지 못한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결혼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번째 핑계는 '서점'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책친구와 춘천의 작은 서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며 '서툰책방'을 목적지로 두고 '썸원스페이지'에서 투숙을 했다. '서툰책방'은 지금은 사라졌고, '썸원스페이지'는 이후 아들과 떠난 여행에서 또한번 묵었던 곳이다. 지금은 '청춘일기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주인은 바뀌었지만 그때의 느낌과 닮아 있어 다시 한 번 머무르고 싶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첫서재'를 핑계로 여행을 다녔다. 혼자 가기도 하고(이럴 경우 책모임이나 작가 북토크를 핑계로 삼는다.), 책친구와 가기도 하고, 레고랜드를 핑계로 작은 아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핑계가 사라지고 있다. 닭갈비는 서울에서 더 싸고 맛있게 먹을 수도 있고, 대학 시절의 추억은 이미 곱씹을대로 곱씹었고, 서툰책방은 문을 닫았고 첫서재는 곧 문을 닫는다. 내게는 반대편 서울로 가는 시간을 투자하면 되지만 도에서 도를 건너가는 춘천행은 방문이나 나들이가 아니라 여행이 되었기에 짧은 시간을 보내고 와도 한참을 여행한 듯 마음이 충만하곤 했는데 핑계가 자꾸만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핑계를 잘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 염두에 둔 핑계는 로봇을 좋아하는 아들과 '토이로봇관'도 가야하고, 레고랜드도 한 번 번 더 갈 만하다. 꿈자람어린이공원을 좋아하니 그것을 핑계로 삼아도 좋겠다. 작은 아들을 낳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나 싶게 죄다 아들을 방패 삼는 핑계다. 책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인정받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므로 춘천에 갈 핑계로 책이 들어설 자리를 누가 마련해 주면 좋겠다. 북유럽책방이나 책방실레까지 들르는 춘천 입구까지의 여행도 나쁘지 않고, 첫서재가 다른 방향으로 공간을 이어가는 것도 좋겠다. 인생 후반을 춘천에서 살고 싶다는 어린 날의 소망은 이루기 어렵게 됐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기에 춘천은 내게 힐링 스팟이자 꿈꾸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어제 만난 사람에게 '자신만의 느티나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멋진 말이다. 소유물로서의 '나의'가 아니라 '나를' 소유하는 대상이라고 해야할까? 누군가에게 그 느티나무는 밤하늘의 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는데 내겐 춘천이라는 도시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마음이 좀 분주하거나 불편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곳, 춘천. 하지만 그렇다고 도로 한 복판에 서 있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지는 않는다. 춘천 그 안에서도 핑계가 될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 장소가 짜잔 하고 다시 등장하길 바라고 있다. 나의 짧은 여행이 지속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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