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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Oct 02. 2022

네스프레소 시티즈가 해결해 준 건 아무것도 없지만

경품 수령기


그날이 어땠더라. 마감 기한은 다가오는데 업무 진행은 더디고 그 와중에 새로운 업무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은 한가득한데 몸이 따라와 주지 않아 답답했다. 막막함에 숨 막혀 버릴 듯한 상태. 떨쳐 버릴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때 부서 내 단체 메신저 방에 알람이 울렸다.



‘A님이 출전한 사내 공모전 결승전 날입니다. 시간 되는 분들은 대강당에 응원 와주세요. 10자리 있습니다.’



부서장이었다. 인원이 20명 남짓한 부서인데 10석이나 채워야 한다는 소리는 입사 연차가 얼마 안 되는 나는 필참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안 가고 싶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럴 거면 참석이 자유로운 분위기인 척하지 말지. 회사 생활하면서 강압적인 말투보다 은근한 강요가 더 싫다.




-




결승전이 열리는 강당에는 심사위원과 평가단, 응원단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다. 본격적인 대회 시작 전 사회자는 상품이 걸린 퀴즈와 경품 추첨 시간이 있으니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운이 필요한 추첨은 살면서 걸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화면에 비치는 상품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첫 번째 발표자가 나오고 화면이 바뀌자 눈에 초점은 더욱더 흐려졌다. A님의 발표 시간에는 그래도 흩어져있던 집중력을 억지로 모으고 모았다. 관련 분야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입상할 수 있겠냐는 걱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한 섹션의 발표가 끝나고 퀴즈 시간이 되었다. 문제들은 공모전에 대해 자세히 알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지원작이 총 몇 개였는지 결승전까지 총 몇 명의 심사위원이 있는지 등. 결승전을 시작하기 전에 틀어줬던 동영상을 정말 자세하게 들었어야 맞출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첫 번째 정답자는 생각 없이 그 숫자들을 적었다가 맞췄고 두 번째 정답자는 찍어서 맞췄다. 운 좋은 사람들.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와중에 마지막 문제만이 남아있었다. 이 문제도 앞선 문제들과 비슷하게 디테일을 요구했는데 이번에는 난이도가 좀 더 높았다. 공모전을 주최한 커뮤니티의 가입자 수를 묻는 문제였다. 진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백 단위까지만 맞추면 된다고 했다. 어디선가 2,600명이라고 했다. 좀 더 큰 숫자라고 했다. 3,100명! 다른 목소리가 자신 있게 외쳤지만, 아니었다. 사회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하면서 그보다는 아래라고 했다. 첫 번째 오답이었던 2,600이 정답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나의 감이 말했다. 정답은 그거라고. 정답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보다 반응이 더 빨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깨는 한껏 올린 상태에서 팔은 귀 가까이에 붙어있었고 몸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온몸으로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어서 그런지 발언권은 나에게 주어졌다. 수십 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와도 눈이 마주치면 더 긴장할 것 같아서 시선은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사회자를 쳐다봤다. 목소리가 목젖에 탁 걸린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말했다.



“...ㅊ...백 명...”



“...?... 크게 말씀해주세요.”



주변 부서원들이 크게 말해 크게라고 속삭였다. 답을 맞혀도 내가 맞추는 건데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와주었다. 무수히 많은 눈은 다시 마스크 아래 숨겨져 있는 내 입에 집중했다. 유아기에 엄마 아빠라고 입을 떼던 순간에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때 이후로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은 몇십 년 만이라 너무 긴장되었다. 얼마나 힘을 주며 말해야 주변 사람들의 고막을 지키면서도 사회자가 있는 저 먼 곳까지 소리가 전달될 수 있을까. 뜸 들이다가는 기회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에라 모르겠다.




.

.

.

.

.

.

.

.






“이-천! 칠배애애애애애-액!”




칠백




백-






“아~ 이천칠백...”















“......”















“정답입니다-! “



헐 대박. 정답이라는 소리에도 얼떨떨했다. 그러나 사회자의 다음 말 때문에 어리둥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상품은 지금 무대에서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많은 데서 직접 받아 가라니. 당황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받고 빨리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에 최대한 보폭을 넓게 하면서 걸었다. 상품을 받으러 가는 몇십 초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찌어찌 올라간 무대에서 상품을 실제로 마주했다. 경품인 네스프레소는 상당히 컸다. 내 상체의 두 배가 되는 상품을 들고 무대를 내려가려고 했다. 그랬는데... 긴장한 나머지 무대 중앙에 있는 계단을 지나쳐 무대 끝까지 가버렸다. 마땅히 계단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곳에 계단이 없자 당황스러웠다. 무대 높이는 대략 150cm 정도 되어 보였는데 여기를 뛰어내려야 하나 싶었다. 부끄러움에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데... 무대 끝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보자 사회자는 계단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여성분! 당황하지 말고 가운데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천천히. 천천히.”



객석에서는 침착해- 침착해- 라는 소리가 들렸고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건지 누군가가 함성을 질러줬다. 아. 다들 그냥 강당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 상품 수령 조용히 하고 싶다. 정말. 계단 위치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던 게 창피해서 온몸을 공처럼 쭈그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상품을 가지고 돌아온 나를 동료들은 부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커피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처리가 고민이었다. 그냥 부서에 기부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참에 행사 진행자가 인적 사항을 요구했다. 그렇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소득에 세금을 내야 하기 마련이다. 건네받은 종이에 사번과 회사 메일을 쓰면서 기부 생각은 접어버렸다. 당근에나 팔아야지.




-




결국 A님은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 공모전의 마무리로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하나둘 무대 앞으로 모였다. 내 몸보다 큰 상자를 들고 있으니 안타까워하면서 B님이 한마디 건넸다.



“해아님 무거워 보이는데 내가 도와줄까?”



워딩만 보면 상당한 친절함이 묻어나지만, 눈빛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잠깐 들어달라고 맡기면 소유권도 가져갈 것 같은 음흉한 눈이었다.



“아니에요. 저 3대 50이나 쳐요. 무겁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그거 부서에서 같이 쓰는 건 어때?”



B님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찔러봤다.



“아.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이거 세금 떼 가더라고요. 세금만 안 냈어도 부서에서 같이 썼을 텐데.”



너스레를 떨며 세금 얘기를 하자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그래. 제세공과금은 인정이지.



“아까는 죽어가더니 지금은 아주 입이 찢어지겠어.”



한동안 컨디션 난조였던 걸 알고 있는 C님이 말했다.



“금융 치료받았잖아요.”



언제 우울한 표정이었냐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경품 상자를 보여주며 웃어 보였다.



“아니 나는 아까 해아님이 경품 받으러 나갔을 때 신나서 경품 자랑하려고 퍼포먼스 하는 줄 알았잖아.”



아까 무대에서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가지고 D님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 상황이 떠올라 얼른 강당을 등지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가을이 정말 온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얼마 전까지 습기 가득한 바람은 어디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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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프레소 시티즈 D113을 손에 얻었어도 여전히 프로젝트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10월 초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는 아직 결과 정리도 하지 못했다. 걱정하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신없는 이벤트 때문에 멈췄던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어본다. 마음을 다잡고 모니터 잠금화면을 풀다가 순간 집중력이 흩어졌다.






당근에 얼마에 올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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