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트레이닝
“오늘 왜 이래? 답지 않게 자신감이 넘치고 긍정적이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평소랑 다른가? ”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회사 동료가 어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다. 글쎄. 퇴근하고 영어 공부하기 싫어서 짜증 부린 기억만 나는데. 무엇이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했는지 시간 날 때마다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그러다가 짚이는 구석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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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 건지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했던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해아 님은 본인이 이무기라고 생각하는 용이에요. 스스로가 용이란 걸 깨닫는다면 성공할 거예요.”
이무기와 용에 관한 이야기를 구전설화에서만 들었지, 칭찬으로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응원의 말이라는 걸 대화 주제가 바뀐 후에야 깨달았다. 그 후 다른 이야기들이 오가고 대화는 기억에서 잊혔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일상에 새로운 빛을 더 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에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밝은 미래를 예언하는 메시지들을. 지금과 같이 그때도 믿지 않았다. 그냥 하는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말의 진의를 계속해서 따졌다. 믿고 싶은 마음과 진실이 아니라는 의심 사이에서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 사람들이 본 내가 진짜가 아닐 때 느낄 실망감과 좌절감 때문에 신뢰를 버리고 안전을 골랐다. 타인은 나를 믿는데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나의 불신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한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내가 메타인지가 안 되는 사람인지 의심해 봐야 했다. 설령 거짓말이라도 이 말을 믿는 게 이득이었다. 내가 대단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음 먹었을 때 실천으로 옮겨야지. 근데 나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얻을까.
스킨케어를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은 어느 저녁. 다시금 내가 용인지 의문이 떠올랐다. 용이라. 내가 용일까 아닐까. 용이라면 어딜 봐서 용이라는 걸까. 용인데 이딴 식으로 쭈그리인 용도 있을까. 스킨을 묻힌 솜으로 얼굴을 닦아내면서 그 문장을 곱씹어봤다.
‘나는 용이다.’
이 단어는 ‘나는 남자입니다.’처럼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나와 완전히 다른 말이라는 생각에 뭐 어쩌라는 거지 싶었다.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으면 한 번은 더 시도해 봐야지. 고작 5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 너무 순식간에 말했나 싶어 이번에는 좀 더 긴 시간 동안 말해보기로 했다.
‘나아느은 요옹이이다아.’
이 문장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속에 담길 수 있게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정하고 있는 나에게 거짓이 아니라고 달래듯이 눈동자를 보면서 재차 말했다.
‘나아아느으으은 요오오오오오옹이이다아아아.’
오밤중에 안 자고 뭐 하고 있는 짓인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실소도 웃음인지라 하루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러 갈 수 있었다. 여태까지 해봤던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드래곤 트레이닝 법 덕분에 다음 날 출근했을 때도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나처럼 사무실에는 빌런들이 존재했고 해결된 일은 없지만 내가 용이라고 떠올리면 모든 게 다 가소로웠다. 비겁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은 이무기 발끝도 못 가는 뱀이고 나는 그 사이에 껴있는 용. 동화인지 판타지인지 모를 비유가 재밌었다. 간악무도한 뱀들에게서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은 느낌에 손톱 끝으로 키보드를 뚱땅뚱땅 눌렀다.
나는 용이 아니라 사람인지라 현실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주문(呪文)의 효과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래도 이무기도 뱀도 지렁이도 다 꿈나라로 갔을 시간에 렌즈도 안경도 없이 맨눈으로 눈동자를 바라보는 시간은 빼먹지 않으려고 한다. 눈만 아니라 내 자체를 들여다보는 시간. 그 시간으로 안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진다. 효력이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한동안 기댈 구석이 생겼다. 다시 한번 거울 속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면서 때때로 일렁이는 동공을 보면서 말한다.
‘나는 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