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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Dec 28. 2023

                  송년 예식

   텃밭이 황량하다. 김장 때 뽑아 벗겨놓은 배추 겉 이파리들만 눈을 뒤집어쓴 채 누워 하얗게 떨고 있다. 김장을 마치고 긴 휴식으로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 기름 짜는 일, 이것이 우리 텃밭의 송년예식이다.



깨끗이 씻어 여러 날 뒤적거리며 말린 참깨와 들깨를 들고 아침 일찍 방앗간으로 갔다. 삼대 째 이어오고 있다는 이곳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람은 없고 고소한 냄새만 가득하다. 평화가 이런 냄새일까.

   

깻자루를 내려놓고 좁고 낮은 쪽마루에 앉았다. 마루와 붙어있는 방을 들여다보니 기름 담을 빈 병들이 누워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있다. 현재 주인의 바로 윗세대나 그 윗세대가 이 방에서 아이를 키우고 급히 식사하며 방앗간을 운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고소한 냄새에 몸을 더 적시다가 밖으로 나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층은 최근에 살림집으로 증축한 듯 대리석으로 지은 깨끗한 외관이 아래층과는 확연히 나뉘어 있었다. 주인은 지금 저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위층에서 남자가 실내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추 달린 재래식 저울에 깻자루를 걸어 무게를 달았다. 그리고 볶아 짜주는 가격만 얘기하고 깻자루를 들더니 거꾸로 엎어 자루의 양 끝을 잡아 솥에 쏟으며 털었다. 주인이 손님과 간단한 인사정도는 나누고 일을 시작해도 좋을 텐데..

   뜨거운 솥으로 들어간 깨는 김을 올리고, 솥 안에 있는 자동 나무주걱이 깨를 넓게 펴며 돌려 볶기 시작했다.

   

봄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깨가 기름이 되어 나오는 시간은 짧았고 그의 부인이 같은 계단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기름을 병에 담아주는 시간임을 알고 있다는 듯이. 키 작고 배 나온 남자 주인은 날씬하고 훤칠한 키의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가 사람들과 교감 없이 등을 보이며 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의 여자에겐 귀엽게 변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는 그녀를 많이 사랑하는 듯했다.

   

그는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인 걸까. 여자는 볼우물을 살짝 보이며 웃고는 쪽마루 옆 저 안쪽으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남자가 옮겨다 준 기름통 안으로 작은 바가지를 넣고 기름을 떠 조심조심 병에 담기 시작했다. 그녀가 쪼그려 앉은 땅바닥은 오랜 세월 기름을 떠 담아 온 자리인 듯 딱딱하고 반질반질했다.

   쪽마루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 내가 위층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글을 쓰다가  남편이 기름을 다 짜놓 시간을 어림잡아 내려와서 기름을 담아주고  다시 올라가 이어서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했다.

   주위에서 떠벌이는 사회적 지위나 재력이 이 공간에선 하찮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나보다 일찍 와서 깨를 맡겨놓고 갔다가 기름을 찾으러 다시 왔다고 했다. 그녀의 귀를 보며 은색 귀걸이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녀는 두통이 있어 고생했는데 지난달에 집에 온 며느리가 이렇게 귀를 뚫어주고 간 뒤로 두통이 사라졌단다. 그녀는 입고 있는 보라색 조끼를 만지며 이건 딸이 사줬다는 자랑도 덧붙였다. 오늘 짜는 기름도 딸과 며느리에게 나눠줄 거라고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처신을 잘하는 어른이리라.

   

방앗간 여인은 참기름을 넣은 병엔 빨간 밀폐뚜껑을, 들기름병엔 노란 뚜껑을 씌워 닫고 두 개의 비닐봉지에 나눠 넣었다. 뚜껑을 씌웠어도, 비닐 안에 넣었어도 기름향이 병을 뚫고 나온 듯 짙었다. 나는 그것을 양손에 한 봉지씩 들고 일어섰다. 할머니에게 먼저 가겠다는 인사를 하고 문 앞으로 가니 어느새 여주인이 와서 앞을 막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방앗간을 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성공이란 지금 여기에서 가까이 있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사는 삶일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소박하다.

    몸을 휘감아 도는 십이월 끝바람이 그리 차지 않았다.

  

 텃밭 송년 예식을 끝냈으니 이젠 겨울 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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