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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Dec 21. 2023

              메리크리스마스

    나에게 겨울은 만두의 계절이다. 어려서 설 때만 먹던 김치만두가 결혼 후엔 김장이 끝나면 바로 만드는 겨울 음식이 되었다. 찬바람에 만두라는 유년향수가 같이 묻어오니까.



  어떤 난리를 겪으며 지지고 볶았든 김장은 끝냈으니 만두는 이제 여유 있게 빚어도 좋으리라. 올핸 농장에서  빚기로 했다.                 

   작년에 남은 김장김치를 잘게 다져 국물을 꼬옥 짜내고 판두부, 익힌 당면과 돼지고기, 숙주나물에 참기름을 넣고 함께 버무려 통에 담았다. 그리고 손으로 꼭꼭 누르고 뚜껑을 덮어 차에 싣고 밤에 농장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떴으나 잠꾸러기 겨울해님은 아직도 취침 중이고, 나는 일어나 더듬더듬 전기스위치를  찾아 올리고 나왔다. 남편도 부스스 일어나 나와서 난로에 불을 지폈다. 난로 위에 물솥을 올리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옆 농장 김여사 내외도 가을걷이와 김장을 끝내서 일은 없으나 오늘도 밭에 나올 것이다. 그들의 밭 한편에서 거주하고 있는 개와 닭들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 김여사 내외는 그들이 자식처럼 생각하는 녀석들의 식사를 해결해 주고 나서 우리 농막으로 올 것이다. 난로 위 물이 끓자 찜기를 얹어 만두를 쪘다. 그들이 오면 이걸로 함께 아침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밖에서 마늘싹 위에 부직포를 덮어주고 있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그들이 온 모양이다. 나는 빚고 있던 만두를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농막 문을 밀고 짧은 마중을 나갔다. 운동화 신은 김여사와 장화 신은 그녀의 남편 최사장이 함께 들어온다. 먼저 쪄낸 건 식어있어서 손을 데일 듯 뜨거운 솥에서 김이 나는 만두로 꺼내 큰 접시에 담아 미리 준비해 둔 양념간장과 함께 그들 앞에 놓아주었다.

   

몸피 큰 최사장은 나무젓가락으로 만두의 허리를 집어 들고 상체를 숙여 입 안에 가득 넣어 먹고, 작은 체구의 김여사는 하나를 양손으로 쥐고 반듯하게 앉아 달을 깨물듯 베어 꼭꼭 씹어 먹는다. 한 개 먹은 그녀는 배부른단다. 그리곤 나와 함께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 내려놓은 만두는 나뭇잎처럼, 그녀처럼 가녀리다.

   식사량이 적고 예쁘게 먹고, 손솜씨 좋은 그녀가 식탐 많고 투박한 손솜씨를 가진 나는 자주 부럽다. 빨리 먹고 있는 최사장의 접시로 나는 자주 눈을 돌렸다. 접시가 비워지기 전에 더 놓아주려고.

   접시가 다 비워가자 솥에서 김이 나는 만두를 여러 개 더 놓았다. 우리들은 요즘은 만두피를 마트에서 살 수 있으니 밀가루를 반죽해 홍두깨로 밀던 옛날보다 얼마나 편한 세상이냐는 말을 주고받았다.

    김여사가 만두 주둥이를 주름잡아 여미며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이 너머 명희 씨가 아프다고. 희귀병이라는데 통증이 온몸을 급습하면 견딜 수 없어한다고. 병원에서 완치는 어렵다 하더란다. 올핸 김장을 못해 김여사네서 한 통 갖다 줬다고 했다.  

    

작년 이맘때, 예전엔  그저 지나쳤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명희씨네 농장에서 새삼 아름답다고 느꼈었다. 이른 오후 그녀네 농장에 갔을 때  김장을 끝내고 그녀의 두 아들은 고기를 굽고 두 며느리와 이웃 여인들은 겉절이에 고기를 싸서 수다스레 먹고 있고,  손주들은 눈을 맞으며 넓은 밭을 뛰어다녔다. 요즘은 보기 드문 이 전경이  한 편의 짧은 옛날이야기처럼 다가왔다. 

   나처럼 점심 초대받아 왔던 옆 농장 남자주인이  혼자 들어서기  민망한지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그냥 돌아서 가자  명희 씨가 찌개 뜨던 국자를 급히 내려놓고 김치통 하나를 들고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던 뒷모습, 사양하는 그 남자의 손에 김치통을 쥐어주던 옆모습, 돌아와서 저 집은  부인이 아파서 올핸 김장을 못했다더라 하던 말.. 모든 사람이 애초에 타고 난 성정은 그녀처럼 선량함일 거라 각했다.  

   점심을 먹으며 나는 저쪽에 저 늙은 호박을 잘 보관하지 않고 왜 나뒹굴게 두냐고 물었었다. 썩은 건데 굳이 몸  숙여 치울 필요 없다고, 그대로 놔두면 그 안의 호박씨가 겨우내 호박 썩은 물과  함께 땅 아래로 스며들었다가 봄이면 싹으로 나와서 그걸 모종으로 심으면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강 건너에서 배 타고 이 동네로 시집와 시아버지에게 농사를 배웠다는 그녀에게서 오래 농사 지어온 농부의 노련함이 보였다. 그녀의 호박 모종 얘기에 나는 "어머 정말, 그러면 되겠네." 하며 놀랐다. 그녀는 이게 뭐 놀랄 만한 정보냐는 듯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겐 새싹처럼 신선한 정보인데. 혼자 농사짓는 거 힘들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농사가 뭐가 힘드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일어나 그녀네 내년 김장날에  그녀네 밭으로 또 가서 그녀와 이웃들의 정겨운 움직임을 보고 그녀에게 또 다른 정보를 얻으며  깜짝 무릎을 치고, 시시하다는 표정을 짓는 여유를 그녀에게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혹여 그녀가 몸이 아파 더는 농사를  못 짓게 돼 밭을 내놓았다더라, 처분했다더라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너나없이 사람의 앞 일은 예단 못한다며 나는 한숨 쉬었다. 이웃에게 김장김치를 챙겨주던 그녀가 일 년 새 다른 이웃에게서 받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신만이 아는 우리의 앞일을 당겨 걱정할 건 없으니 그저 지금을 사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들은 말했다.

   

최사장이 계속 먹으며 말했다. 여기 어떤 만두는 되게 못생겼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말 안 하겠다고. 만두소를 잔뜩 넣고 주둥이를 꾹꾹 눌러 붙인 내 만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이 인정욕망만을 장착하고 지내던 내 젊은 날이라면, 불안에 스치기만 해도 터질 듯한 분노를 품고 살았던 그때라면, 겨우 만두 못생겼다는 농담 한 마디에 발끈, 아니 그 용기도 없어  샐쭉했을 것이다. 곁에 오래 두고 쪼물락 거려 온 세월은 나 이대로를 인정하는 여유 선물했다. 나는 속 먹자는 만두요 겉 먹자는 송편이니 모양이야 어떻든 만두는 속만 맛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만두 빚는 손을 멈추지 않고 이어 말했다. 친정에선 내가 만든 만두는 하도 못생겨서 '발만두'라 부른다고.  그들이 웃었다.      

    

주말에 농사짓겠다고 이곳에 들어온 지 사 년이 되었다. 우리들의 마음과 몸은 사 년의 시간만큼 쇠해져 있다. 최사장이 때와 장소 없이 이웃이나 아내에게 왈왈 대는 횟수는 줄었고,  호미질하다가 일어설 때 무릎 잡고 남편이 내는 아구구 소리는 더 잦아졌다. 나의 손가락 관절염은 그 시간만큼 진행돼 있다.    

   

겨울은 초조함을 동반한다. 우리가 앞으로 몇 년이나  이렇게 더 같이 지낼 수 있을까. 머지않은 앞날에 우리 가치매의 감옥에서 가끔씩 본 정신으로 나오게 될 때 오늘을 추억한다면 그나마 행복할 거라고 내가 말했다. 이 누추한 농막을 전원카페라 부르는 최사장이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평소 그 답지 않은 분위기로 말했다. 만두 줘 커피 줘, 빵도 줘, 무료 전원카페에서 같이 지낸 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냐고.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이 많다며 그들이 일어섰다. 저녁에 자식들이 손주들 데리고 방문할 예정이라 대청소해야 한단다. 우리도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일어서 나왔다. 눈발이 날린다.  언제 다시 만나든 헤어짐은 아쉽다. 다음 주말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 인사했다. 분홍색 운동화를 신은 김여사는 사뿐히, 곤색 장화를 신은 최사장은 저벅저벅 그들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좀 더 바라보다가  농막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서는데 최사장이 다시 돌아서서 손을 들어 외친다. "메리크리스마스." 옆에서 김여사도 손을 흔든다. 우리도 다시 그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손을 들어 화답했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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