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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r 04. 2024

         지금도 여행 중

   나는 언제나 여행 중이다. 언어를 찾아다니는 여행이니 장소는 가리지 않는다. 그곳은 동네가 되기도 하고 거실이 되기도, 내 마음이 되기도 한다. 정겨운 말이나 명언, 성찰의 언어는 어디에나 떠다니기에. 그것을 발견하면  잡아채 여행바구니에 넣어야 한다. 잡기를 머뭇거리거나 미루다간 흔적 없이 사라질 테니까.     


농사가 시작되지 않아 이웃 텃밭 농부들은 아직 기척이 없다. 나는 이쪽 입구의 밭주인이며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양연 씨에게 함께 산책하자고 전화했다.

   나와 동갑이어서 가까워지게 된 그녀가 우리 밭으로 와서 강 옆으로 난 흙길을 함께 걸었다. 뽀얀 피부에 말은 빠르고 마음은 강직한 그녀를 나는 좋아한다. 그녀가 봉지에 넣은 완두콩 씨앗을 내 잠바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정월 보름이 지나면 바로 완두콩을 심는다고, 한 뼘씩만 간격을 두고 심으면 된단다.


삼 년 전에 공직에서 퇴직한 그녀는 공부에도 농사일에도 바지런하다. 퇴직 후 유튜브로 나물과 농사를 공부하며 지은 야채들과 밭 주변 그늘에서 저절로 난 쑥, 질경이 등을 뜯어서 로컬푸드 매장에 내다 팔아 쏠쏠한 재미를 봤단다. 그리고 그녀는 더 빠른 속도로 애호박은 바로 따서 팔면 1500원, 따지 않고 늙기를 기다렸다가 가을에 따서 팔면 15000원, 얼지 않는 곳에 잘 보관했다가 매장에 늙은 호박이 얼추 다 빠지는 한 겨울철에 내면 25000원 받는다고 해 나는 장갑 낀 손으로 손뼉을 퍽퍽 치며 웃었다.


더 걷다가 그녀가 여기 냉이와 속속이풀이 많다며 조금 아래 벌판으로 몸을 옆으로 해 살짝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냉이와 속속이풀이 어릴 땐 비슷해 보여  구분이 어렵다며 차이점을 가르쳐주는데 설명하는 그녀 곁에서 나는 신경 써서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냉이와 속속이풀’이라는 고유명사에 홀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넣느라. 그리고 이런 이름은 대체 누가 짓는 걸까 궁금해하느라.     

  다시 길 위로 올라와 더 걷다가 큰 카페가 보여 그곳에 들어갔다. 그녀도 나도 커피를 마시면 밤잠을 못 자서 같이 따끈한 밀크티를 주문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차는 메뉴와 상관없이 행복감을 배가시킨다. 그녀가 휴대폰으로 보여주는 여덟 살 손녀 사진을 보고 나는 아, 하며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의 표정에서 종종 어른 같은 마음의 깊이를 보기도 하는데 이 소녀에게서 그것을 느꼈으므로.


옆 테이블에서 긴 머리 아가씨가 남자친구의 가슴에 옆머리를 기대고, 청년은 한 팔로 아가씨의 허리를 감고 앉아 얘기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앉아있는 연인이 보기 좋다고 말하자 그녀는 이 상황과는 다른  말일 수도 있지만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고 작은 소리로 빠르지 않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저 커플에게 그 타인은 아닐 거라고 그녀가 몸을 내 앞으로 숙여 말하며 미소 지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집어 열고 그녀가 안겨준 말을 메모장에 적었다.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사르트르.’


그녀는 직장을 다닐 땐 책을 꽤 읽었는데 퇴직 후엔 오히려 읽게 되지 않더라고, 자기의 독서도 이젠 여럿이 함께 하는 인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의 피곤한 얼굴이 맘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가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괜찮다며 나가서 걷자고 했다.


 꽃샘추위 속을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작은 동네를 관통해 조금 더 가니 숲길이 나왔다. 나는 장 담근 얘기를 했다. 메주를 주문해놓고 바로 후회했다고. 장 담글 엄두가 나질 않아 예약해 둔 주문을 취소할까 고민하다가 생산자에게 미안해 그냥 받았고, 미루면 담그기 싫어질 것 같아 받자마자 소금물부터 만들었다고, 그렇게 시작하니 담가지더라고 했다. 그런데 이젠 사십일 후에 장 뜰 일이 또 부담이라고, 그러게 애초에 메주를 주문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

   “밥 하듯이 누구나 쉽게 하는 거라면 귀하게 생각하겠어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거면 옛날에 간장을 한 대접 달라하지 않고 한 종지만 달라고 했겠어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으나 나에겐 크게 울렸다. 드디어 얼른 잡아 여행바구니에 담을 말이 날아온 것이다. 근처 차가운 벤치로 가서 앉아 그녀가 한 말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한 종지의 간장보다 더 귀한 이 언어가 찬바람을 타고 멀리 달아나버리기 전에.


세상은 온통 선물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아래로 얼어있는 개울과 그 주변에 드문드문 녹지 않은 눈 풍경이 그대로 겨울 수묵화다. 수묵화의 풍경으로 선한 마음을 선물 받고, 코끝 싸한 날씨로 명료한 정신을 선물 받는다. 또한 불현듯 보고 싶을 때 편히 만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 이웃은 늘 안고 있는 선물과도 같다.


더 걷다가 돌아서 출발 지점인 우리 밭으로 왔을 때 저녁 무렵이 돼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고 채근하는 그녀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집 쪽으로 같이 더 걸었다. 그녀가 사는 집까지는 한참 더 걸어가야 하기에.


삼거리에서 그녀에게 조심히 가라며 등을 밀고 나서 나는 그녀를 지켜보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잿빛 패딩 롱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 서서 바라본다면 내 뒷모습인 듯 막연한 연민으로 애잔해질 거라서.     

   

밭을 향해 걸으면서 이제 내 마음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내 안에선 어떤 언어가 떠다니고 있는지.

   

함께, 같이..

  내면의 내가 말을 한다. 보고 싶을 때 만나 함께 걷고 같이 웃는 이승의 삶이지만, 아무도 못 막는 절대 고독을 안고서 무언가가 세게 등을 미는 저 먼 곳으로 각자 총총히 갈 수밖에 없는 슬픈 발걸음도 함께 느끼고 있다고.


내일은 울타리 아래에다 완두콩을 심어야겠다. 한 뼘씩만 간격을 두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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