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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Aug 06. 2023

          1회 세척부추

   '이 열정을 다 태우고, 남은 재마저 태워버릴 날은 언제인가. 그리하여  세상에 우뚝 설 그날이 언제냐구.' 삼십 대 젊은 엄마일 때 식사 준비로 식탁을 차리면서, 설거지하면서, 누워서 양팔 벌려 두 아이에게 팔베개해주고 방 천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으로 안달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서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무언가를 빨리 이뤄 세상 위에 우뚝 서 만인 앞에서 손 흔들며 잘난 체 하고 싶은 욕구였다.

   

그것을 우리 농장의 조선부추가 해냈다. 그들은 텃밭 한 편에서 세상을 향한 소망을 품고 지내다가 겨울에 제 주인이 난로에서 태워 뿌려준 나무의 재를 추위 속에서 스스로 녹여내더니 봄이 되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여름 한가운데서  진초록의 잎으로 제 키를 키워놓고 폭우에도 하늘을 향해 짱짱히 서있지 않은가.

   오늘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이 부추를 직매장에 낼 생각이다. 이런 날은 전 부쳐먹기 좋은 날이므로. 비옷을 입고 농장으로 나갔다. 세찬 비에 몸을 맞으면서도 씩씩하게 서있는 부추를 베어  들여왔다. 그것을 농막 안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다듬기 시작했다. 아래 검불은 벗겨내고 위의 작은 떡잎은 떼어내고. 그러나 그렇게 신경  다듬었어도 끝내고 보니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검불이 드문드문 보였다. 더 깨끗하게 선보이고 싶어 부추를 다라에 넣고 수돗물을 틀어 씻었다. 그러자 세찬 비 속에서도 튼실하던 부추가 축 처지지 않는가. 나는 얼른 주변 지인들에게 부추가 왜 이러는지 전화로 물어봤다. 그들에게서 부추는 물에 씻으면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정에서 부추를 냉장고에 보관할 때도 씻지 고 그대로 보관해야 신선도가 오래 간단다. 살림을 수십 년 해온 내가 왜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이 부추들이 매장에 나가면 팬들이  몰려올 거라는 확신은 씻은 후의 이 아이들처럼  바로 시들해졌다. 초보 농사꾼의 부추  판매의 길이 쉽지가 않구나. 채소는 싱싱함이 생명인데 이를 어쩌나.


   나는 매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도 계속 갈등했다. 이번에 부추 출하는 포기할까. 매장에 도착할 무렵 해결책이 생각났다. 이렇게 해보자.

   가격 조사를 위해 매장으로 먼저 들어가 남들이 내놓은 부추를 살폈다. 씻지 않은 그들의 부추는 모두 싱싱했고 가격은 센 편이었다. 나는 매장을 나와 키오스크로 이동해 차 안에서 궁여지책 끝에 고안해 낸 대로  품목란에 자판으로 '부추'라 치지 않고 '1회 세척부추'로  고백해 포장 봉지에 붙였다. 일반 마트에선 씻어 나온 무도 있으니까. 나는 마트에서 흙 묻은 무는 사지 않고 늘 씻어나온 무를 사니까.

부추 가격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비싸게 붙였다. 겉이 풀 죽었다고 속까지 기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매장으로 다시 들어가 그것들을 매 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며 내 아이 같은 그것들을 슬몃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부했다. '시무룩하지 말고 고객들 꽉 잡거라. 목욕하고 나왔다는 명분으로'


 350그램씩 열다섯 봉지 담아낸 '1회 세척부추'는 그날 완판 되었다.

고맙습니다, 제 물건 선택해 주신 고객님들. 그리고 부추 내 새끼들아 해냈구나. 열화를 태운 재마저 녹여버린 내면의 그 멋진 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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