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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Aug 31. 2023

              천국

   천국은 저 위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 않다. 가까이 있는 가족들과 함께 웃으며 지내는 삶이 있는 곳, 그곳이 천국이다.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면서 가지와 호박이 많이 열린다. 동이 트자 농장으로 나가 그것들을 쪽가위로 따서 초록 넝쿨 아래 놓인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제 시골에서 올라온 작은 시누이가 가지를 다섯 개씩 모아 한 묶음으로  만들기 위해 랩으로 당겨가며 그것들의 허리를 묶는다.  어제 그녀와  함께 올라온 시동생도 앉더니 동그란 애호박들을 하나하나 모양을 따라 조심스레 랩으로 싼다. 나를 미안하고 부끄럽게 하는 시댁의 내 형제들. 그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은 한결같았고 마음의 조막손으로 행한 나의 행실은 어리석었다.

   

내가 시집왔을 때 형제들은 시어머니와 함께  나에게 잘해주려고 벼르며 기다리고 있는 전사들 같았다. 첫 한식 때 조상들 산소를 손 보기 위해 어머니와 작은 시누이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 가족들이 모였다. 나와 남편은 밤늦게 도착했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작은 시누이가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애기 쑥을 넣고 끓인 된장국이 얼마나 맛있던지. 식사가 끝나자 내가 일어나 밥상을 들 여유도 없이 녀가 얼른 일어나 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으응'으로 그래 그래야지 느낌의 답을 하셨다. 올케며 며느리인 나는 그들이 나를 좀  어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교만의 씨앗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 새댁의 자리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이후 여름휴가 때 시댁에 내려갔다. 일주일을 지내고 집으로 오는 날 아침에 어머니는 내 구두를 닦아 신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 댓돌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 사실도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남편이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내게 얘기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놀랐으나 그저 그러고 말았을 뿐이다. 내가 잘 나서 어머니가 그러시는 줄 알았으니까.

   

서울 등 객지로 나간 오빠들을 대신해 혼자 계신 어머니를 살피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도시로 나가지 않고 집에 있던 작은 시누이는 내가 큰 아이를 낳았을 때 서울 우리 집으로 올라와 몸조리를  맡아해 주었다. 그 겨울, 아기와 나는 따끈한 단칸방에 누워 그녀가 빨래를 널러 또 걷으러 옥상으로 올라가 눈 밟는 소리를 들었다.  

   남은 밥은 자기가 먹고 나에겐 매 끼 밥을 새로 해서 미역국과 함께 주었다. 아이의 배꼽이 다 마를 때쯤 그녀는 사알 살 아기의 배꼽 줄을 떼 주었다. 그녀의 손끝은 야물었으며 차분하고 성숙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해준 후 그녀는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고생한 후 내려가는 그녀의 손에 나는 달랑 차비만 쥐어줘 보냈다.  


둘째 아이 낳았을 때도 시누이는 그렇게 했고 나는 또 그렇게 했다. 남의 집에 돈 빌리러 가는 상황이 될까 봐 사는 게 얼마나 두렵던지, 내 앞가림 하나 만으로도 삶이 벅차다고 생각했으니까. 니 사는 게 시퍼런 바다 위에서  외줄 타는 심정이었단 표현이 맞겠다.

 

  어머니는 고추와 마늘 농사를 지어 해마다 보내 주셨다. 마늘은 한 알의 크기가 사람 주먹만 했고 고춧가루는 색깔이 곱고 달았다. 자식에게 줄 생각으로 씨앗을 심고 가꾸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음과 몸의 노고를 그땐 생각도 못했고 그저 때 되면 어머니 손에서 그것들이 나오는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용돈 한 번 드리지 않은 채 꼬박꼬박 받아만 먹었다.  이러는 내가 나도 불편하다고 느끼면서.

   

결혼해 각기 자기 식솔들 챙기느라 바쁜 형들을 대신해 시동생은 객지에서 돈 벌어 어머니와 시누이의  생활비를 대고 있었다. 시누이가 학교를 다닐 땐 그녀의 학비까지도. 시동생에게 미안하면서도 바닥부터 시작한 나의 생활도 녹록지 않다고 생각하며 어머니 생활비 송금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렇게 어머니와 형제들은 자신의 상황 안에서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풍족한 삶이란 많은 것에서만이 아니라 적은 양에서도 적게라도 나누는 것. 어머니께 생활비 좀 보냈다 해서 시누이에게 용돈 좀 줬다고 해서 내 집 마련의 시기가 늦어졌겠는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받은 것이 없더라도 부모 형제에게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해야만 하는 도리이다. 그러나 나는 시댁의 가족이  되기 전부터 유무형의 많은 것들을 받지 않았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끼리는 멀어져선 안 된다고, 시댁의 내 가족들은 저렇게 가지를 묶듯 나를 자신들과 한 가족으로 짱짱히 묶느라  애썼고  애호박을 저렇게 동그랗게 싸듯 나를 싸 안느라 맘고생들이 많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시누이도 시동생도 결혼을 했고 나의 결혼 8년 만에 어머니는 타계하셨다. 그리고 세월은 또 흘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지도 한참 됐다. 형제들도 밴드를 만들었다.


   어느 겨울날, 눈보라 치는 풍광을 찍은 동영상과 함께 나는 거기에 글을 올렸다.


'눈이 많이 나리네. 결혼, 그 낯선 광장에서 아직은 가족들과의 관계에 익숙지 않던 시절, 돌아보면 가족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떠나신 어머니께도 역시 그렇고... 다행히 형제들은 아직 이승에 있으니 우리들의 여생은 괜찮을 거예요. 모두 평안하시기를..'   


형제들은 댓글로 아무 말 없이 하트 이모티콘만 마구 쏘아댔다. 오늘은 함께 하지 못한, 내 결혼 당시 우리보다 먼저 결혼해 있었고, 지금 공주에 살고 있는 큰 시누이도.   


  우리들은 호박과 가지를 승용차에 싣고 달려 매장에 도착했다. 아직 초보 상인이어서 우리는 이렇게 요령이 없다.   키오스크로 가서 빼온 가격 스티커를 매장 안으로 들어가 진열하며 여유 있게 붙이면 될 것을  주차장 바닥에 앉아 그 작업을 했다. 자신의  차를 우리 차 옆에 조심스레 주차한 농부가 차 문을 열고 나오며 우리를 쳐다봤다. 그를 올려다보며 시누이와 나는 까르르 웃었다. 위험한 주차장에서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큰 웃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이걸 붙이고 있네요." 하자 그 젊은 농부도 씩 웃고 그냥 지나간다.

   

가격표를 다 붙인 후 남편과 시동생이 사각 바구니를 각각 하나씩 들고 다 같이 매장으로 이동했다. 눈으로도 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누이가 보기 좋게 매대에 진열했다. 내가 진열했을 때보다 매대가 더 풍성하고 신선해 보였다.

  

 진열을 끝내고 농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해장국집에 들어갔다. 나와 남편은 콩나물 해장국을, 시동생과 시누이는 선지 해장국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첫 수저를 뜨기 전 나는 시누이의 뚝배기에서 선지를 한 덩어리 떠 내 뚝배기로 옮겼다. 콩나물 해장국 주문한 것을 순간 후회하며. 시누이가 자기의 선지를 몇 덩어리 더 떠서 내 뚝배기에 옮겨 주었다. 시동생도 자기의 뚝배기 안에 들어있는 선지를 떠서 내 그릇에 넣어 주었다.


그날 저녁 매장 측으로부터 가지와 애호박이 완판 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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