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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Jul 26. 2023

               장화

   여주와 오이가 조잘조잘 열리고 있다. 봄에 모종으로 심은 후 어서 자라 뻗어나가라고 높이 지붕을 만들어줬다. 이 아이들은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 세상을 돌더니 열매를 달고 향과 그늘까지 선물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농막 안에 있는 탁자를 들어 바깥 그 그늘 아래로 옮겼다.


   “아유, 이 집 깻잎은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이불로 덮어도 되겠네.” 이웃 농장의 영신 씨가 빵이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들어오며 수다스럽다. 병원 간호사로 퇴직한 그녀는 큰 체격에 팔자걸음으로 늘 경쾌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빵공장을 안 열었는데 문을 두들기고 사장을 불러내 사 왔다며 탁자 위에 빵 봉지를 풀어놓았다.

   즐거운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의 간호를 받았던 병원 환자들도 즐거웠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차림새는 전문 농사꾼처럼 그럴듯하나 사실 농사엔 나만큼이나 문외한이다. 호미로 딱딱한 땅을 조금만 콕 파서 씨앗을 넣어 흙만 덮고 말뿐 물 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어떤 비료를 줘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봄에 그녀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씨앗이 답답해 숨을 못 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땅을 넓게 파서 흙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난 다음에 씨앗을 넣어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물을 흠씬 마시게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신혼 때 까다롭고 성질 급한 남편과 주도권 싸움을 하다가 남편을 이기지 못했단다. 중년이 돼서 남편에게 다시 도전했으나 남편이 더 강하게 나와 도전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조용히 산다고 했다. 같이 오래 살다 보니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더란다. 지나치게 깔끔해 그녀가 하는 집안일을 못마땅해하던 남편이 이젠 잔소리를 포기하고 살림을 도맡아 한단다. 서로 하나씩 포기하니 편해졌다며 그녀가 웃는다. 그녀네 농장은 부부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예 처음부터 반으로 나눠 한쪽은 그녀가, 한쪽은 그녀의 남편이 짓고 서로 참견하지 않는단다. 그래선지 그녀네 밭에선 부부간 언쟁이 없다.

   

김여사네 밭을 조금 빌려서 짓고 있는 신흥리 부부를 불렀다. 빵 같이 먹자고. 둘이 똑같이 곤 색 장화를 신은 채 호스를 들고 고추고랑에 물을 주던 그들은 다른 작물에도 물을 주고 오느라 한참 후에 우리와 합류할 수 있었다. 방금 딴 참외 두 개를 들고서. 나이가 사십 대인 이들은 평일에도 일찍 나와서 밭 한 번 둘러본 후 출근하고, 퇴근길에도 들러 작물을 살펴주고 집으로 돌아간단다. ‘나는 저 나이 때 뭘 하고 지냈더라?’ 밤이고 낮이고 잠만 잤던 기억뿐이다.

  

 벌이 탁자 위를 돌며 잉잉댄다. 신흥리 여인은 놀라며 몇 년 전에 장화를 신으려고 발을 넣다가 장화 속에서 벌집을 만들고 있던 말벌에게 쏘여 구급차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경험을 얘기했다. 밭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오느라 더 나중에 온 김여사가 자기는 겨울에 잃어버린 다이야 반지를 농사 시작하는 봄철에 장화를 신다가 그 속에서 찾았단다. 인생은 확인 없이 신는 장화와도 같다. 그곳엔 예상치 못한 불행과 행운이 같이 들어있으므로.

   

김여사는 비둘기가 오기 시작하면 참깻대를 얼른 베어주라고 우리들에게 일러줬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비둘기가 오더라도 참잎이 누렇게 변해야 베어주는 거라고 했다. 깻대 베어주는 시기를 가지고 이들 부부는 또 다투기 시작한다. 이들은 둘 다 농사 전문가여서 자주 이렇게 시끄럽다. 깻대에 붙어 피어있는 연보라 꽃들이  방실댄다. 두 사람 말이 다 맞는다고 하면서. 저들이 싸우든 깨꽃이 웃든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더 작은 깨 주머니 속에서 나와 모인 깨알들이 한 줌이 되고, 더 모여 한 됫박이 되고 한 말이 되는 신비로움에 나는 마음만 간지러울 뿐이다. 반찬에 솔솔 뿌리는 양념으로, 참기름으로 변신하는 그날까지 이어지는 농부들의 숭고한 노고를 어떤 설명으로 다 표현할까.


   나이 드니 내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가는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니 김여사네 농장에서 벌써 영신 씨 목소리가 들린다. 울타리는 호박 넝쿨로 수북이 덮여있고, 김여사네 농장도 세심한 보살핌을 받은 작물들이 잘 자라 있어 사람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다. 아무도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이 조용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다 알아낼 수 있다.

 

  “아유 지금 뭘 또 주고 있는 거예요?” “영양제요.” “아니 얘들은 비료 한 번만 먹으면 됐지 뭘 자꾸자꾸 달라는 거야? 나는 유방비료 딱 한 번만 주고 마는데.” 그러자 김여사의 소리가 들린다. 애기 젖을 딱 한 번만 주고 마느냐고. 혼내는 김여사의 목소리보다 혼나고도 웃는 영신 씨의 웃음소리가 더 크다. 비료 이름이 재미있어서 나는 ‘쿡’ 하고 웃었다.

   

젊어서는 그대들이 나만큼 아느냐 오만함으로, 나도 너만큼은 안다 열등감으로 이웃이 하는 말에 귀를 닫고 살았었다. 나이 드니 이웃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귀를 열어 듣게 되고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슬리퍼를 끌며 그녀들의 소리가 있는 곳을 향해 가는데 남편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운다. 뱀 나올 수 있으니 장화 신으라고. 우리 작물들도 울창해 남편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그는 지금 어디서 나를 보고 있는가.

   농막으로 다시 들어가 빨간 장화를 찾아냈다. 장화 속에 벌이 들어있을지 몰라 조금 멀리 서서 자루 달린 빗자루를 거꾸로 들어 툭툭 쳐보고, 혹시 금반지라도 들어있지는 않을까 다가가 흔들어도 봤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후 얼른 장화를 신고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무성히 자라 있는 고추나무에 앉아 나를 만지는 이슬들을 성가셔하며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며 들어갔다.

  

 그녀들이 있는 고랑 지점에 당도해 물었다. ‘유방비료’라는 게 있느냐고, 무슨 이름이 그러냐고. 고춧대와 고춧대 사이를 파고 하얀 조개탄 같은 영양제를 넣어주고 있던 김여사가 호미를 든 채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신고 있는 파란 장화가 위에서 하늘이 찢어져라 웃는다. 유방비료가 아니고 유박비료라며 영신 씨의 하얀 장화가 배꼽을 틀어쥐며 웃고 있고, 머쓱해진 제 주인을 대신해 나의 빨간 장화가 깔깔 웃어준다. 유박비료는 닭똥처럼 생겼고 열매가 열리는 채소에 많이 쓰이는데 효과는 다른 비료에 비해 늦다고 영신 씨가 설명해 줬다. 그녀가 농사에 관해 나만큼 모르고 있지 않아 놀랐다. 유박비료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마른날엔 사박사박 젖은 날엔 자박자박, 우리들의 장화 소리를 들으며 고추와 여름 알곡이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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