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고추모종을 이백오십 포기 심었다.
물과 햇빛, 공기를 받아먹고 마시며 아가들은 탈없이 자랐다.
대가 굵어지고 가지가 뻗기 시작했다.
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해가 되는 것은 이제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제 노릇도 못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양분을 막고 앉아있는 방아다리 아래 순은 다 훑어 버렸다.
이웃 밭에선 고추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밭에선 꽃이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럴까, 이유를 궁금해하며 다른 이웃들의 밭도 이리저리 다녀봤다.
이리 한들 우리 농장에서 안 나올 꽃이 나올 리 있을까만 몸은 자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 시기가 어찌 다 같겠는가.
삶의 꽃을 피우는 시기도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데 너무 늦긴 하네..
어느 날 작고 하얀 별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숨어있다가 튀어나온 듯.
작고 하얀 기적, 남편도 나도 작고 하얗게 웃었다.
작은 점 만한 연둣빛 열매가 맺혔다. 꽃을 밀어내며 제 몸을 키워갔다.
열매는 연두에서 초록으로 달려갔다.
이대로만 자라면 올 고추 농사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도할 즈음 잎이 노랗게 말라가고 열매는 오그라들고 있었다.
왜 이럴까, 올해 고추 농사는 망치려나보다 당황하며 농협에서 정년퇴직한 애들 고모부에게 사진과 함께 문자로 물어봤다.
그는 응애 벌레가 못살게 굴어 열매가 아파하고 있으니 응애 약을 쳐주라고 일러줬다.
농협에 가서 그 약을 사다가 뿌려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무를 괴롭히던 벌레가 모두 없어져 잎과 열매가 다시 싱싱한 초록으로 웃고 있었다.
이제 장마 때 많은 비만 오지 않으면 별 탈이 없을 것이다.
비를 많이 주고 적게 주고는 하늘의 소관이니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를 너무 많이 내려줄 경우 탄저병이 몰려와 붉게 익은 고추들이 죽을 수 있다.
어떤 이의 말로는 탄저병이 들이닥치면 다 익은 고추들이 떨어져 쌓여 고랑이 온통 빨갛단다.
나는 그 상상을 하며 유난한 무더위에 헉헉대며 더위를 식혀줄 비를 기다리면서도 탄저병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의 기원을 하늘이 알았을까.
비는 많이 내렸으나 용케도 탄저병은 비켜갔다.
하루 햇빛에도 많은 열매들이 익어갔다.
그늘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니 일렬로 서있는 고춧대가 빨간 고추무늬 치마를 입고서 누구 치마가 더 예쁘냐고 묻고 있지 않는가.
"저 무늬 하나씩 따기도 아깝네요." 텃밭 이웃에게 말했다.
덥다.
고추가 빨갛게 익었다고 다 따진 않는다. 다 익은 시기가 조금 지나 습기가 빠져 비들비들 해졌을 때 따줘야 나중에 말리면 색이 곱게 나온다. 건조기에서 말리는 온도와 시간도 색깔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밖으로 나가니 이웃 농장에선 우리보다 먼저 나온 이들 소리로 부산했다.
뒷집은 다른 동네에 사는 가족들까지 동원해 고추를 딴단다.
나와 남편은 고랑을 나눠서 따기 시작했다.
나는 빈 사각 바구니를 앞으로 밀며 좁은 고랑 사이로 기어 들어가 고추방석을 놓고 앉았다.
고추를 쪽가위로 딸 땐 꼭지가 길도록 잘라줘야 나중에 꼭지를 딸 때 편하다.
일을 급히 하려다가 오히려 늦어지는 경우가 나에겐 종종 생긴다. 그럴 때마다 손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급한 성격이 고쳐지진 않는다.
위로 올려다보며 쪽가위로 똑똑 고추 꼭지 끝쪽을 자르는데 모기가 자꾸 발을 물었다. 겁 없이 양말도 신지 않은 채, 그것도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일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발등이 따갑고 가려워 고랑 밖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고춧대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기어 나가서 양말을 신고 슬리퍼는 장화로 바꿔 신고 다시 들어갔다.
부지런히 따니 큰 바구니에 어느새 고추가 넘쳤다. 다 찬 바구니를 밀고 또 밖으로 나가서 빈 바구니 하나를 더 가지고 들어와야 했으나 나오고 들어가는 잠깐의 시간도 아껴야 할 만큼 내 상황은 급하다.
해가 올라와 비추면 피부 알레르기로 고생해야 하기에 그전에 몸을 빨리 놀려 최대한 많이 따고 농막 안으로 피해야 한다.
고추를 급한 대로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 담았다.
앞치마도 가득 차 더 담을 수 없게 되자 윗저고리의 양 가슴 주머니에도 꽂아 넣었다. 바지 주머니로도 밀어 넣었다.
어느새 해가 올라와있었다.
고추를 몸에 잔뜩 품고 사각바구니는 밀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먼저 빨간 그녀들의 몸에 묻어있는 흙과 먼지를 씻어주기 위해 넓은 다라에 그녀들을 넣어주고 물을 틀었다.
휘휘 저어주니 그녀들은 찰랑대는 물 위에서 간지럽다며 자꾸 밖으로 도망을 나갔다.
밖에 있는 그녀들을 잡아 안으로 넣어주며 씻어 다른 용기에 옮겼다.
식초와 소다를 탄 물에 그녀들을 담갔다. 삼십 분 동안 그녀들은 몸 소독을 하며 앉아 있어야 한다.
삼십 분 후에 목욕수건 삼아 양파 망으로 하나하나 잡고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때를 밀어주니 그녀들은 시원하다며 까르륵까르륵 웃어댔다.
용기를 수차례 바꿔가며 자꾸 씻어주자 그녀들은 이제 귀찮아했다.
나도 힘에 부치던 터라 그만하고 그녀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샤워기를 틀어 물을 한 번 더 뿌려주고 나서 그대로 두었다.
물이 다 빠질 즈음 우리는 고추 담긴 바구니를 양쪽에서 들고 안으로 옮겼다.
남편이 꼭지를 따며 마른 수건으로 하나씩 닦아 사각 채반에 차례로 뉘어준 뒤 건조기에 넣으니 새벽이 되었다.
고추 안에 곰팡이가 나지 않으려면 조금의 습기도 없도록 완전히 말려야 하고 색이 고우려면 말리는 온도를 잘 맞춰야 한다.
처음 여섯 시간은 쪄야 한다. 건조기 온도를 65도에 맞춰놓고 남편이 잠을 자다 깨다 하며 온도와 시간을 체크했다.
이후 말리는 과정은 55도에 맞춰놓는다.
이렇게 이틀 조금 넘게 시간을 보냈다.
건조기를 열어보니 고추는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잘 말라 있었다.
열흘 간격으로 고추를 또 따고 또 씻고 말리는 이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농막 안에는 잘 마른 고추 봉지가 놓여갔다.
고추나무는 제 몸이 감당할 만큼만 꽃을 피운다. 고추를 따서 무게를 덜어줘야만 그 무게를 감당할 만큼 또 꽃을 피운다.
우리는 고추를 부지런히 땄고 씻었고 말렸다.
고추 꽃이 계속 피었고 꽃 진 자리에 또 열매가 맺혔고 여전히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하며 자라고 빨간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익는 시간이 더디긴 해도 이 건강한 순환은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저쪽 이웃이 정보를 주었다. 아직 익지 않은 저 많은 초록 고추를 빨리 붉게 하는 약이 있는데 그것을 주면 추워지기 전에 두 번은 더 딸 수 있다고.
그 정보를 접하는 순간 나는 초록 고추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 약을 먹고 제 의지가 아닌 주인 의지로 색을 바꿔 입은 고추가 우리를 얼마나 미워하겠는가.
우리는 두 번 더 할 수 있는 수확은 포기했다.
늦은 밤, 참깨 베어낸 자리에 비닐을 깔았다. 새벽이슬을 맞게 하려고 그 위에 말린 고추를 쏟아 다시 펼쳤다. 마른 고추가 다시 습기를 머금어야 방아를 빻을 때 가루가 날리지 않으니까.
트럭에 말린 고추를 싣고 방앗간으로 달렸다.
깨끗하다고 소개받은 방앗간은 농장에서 꽤 멀리 있었다.
강길을 따라 한참을 가서 도착하니 이른 시간인데도 방앗간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고추를 가지고 온 손님들로 조금 붐볐다.
조금 기다리자 우리 차례가 되었다.
고추가 첫 번째 기계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제 몸을 부수며 큰 별이 되어 나왔고 두 번째 기계에선 더 작은 별이 되어 나왔다.
마지막 세 번째 기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빨간 별 가루가 되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수개월 우리와 함께 했던 그녀들이 백여 근의 별 가루가 되어 우리에게 안긴 것이다.
우리는 별가루 봉지를 들고 트럭 짐칸으로 날랐다.
다시 밭으로 달렸다.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우, 눈물 나네!"
고개를 강 쪽으로 돌렸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말이 없고 강물도 은빛 물결만 살랑일 뿐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