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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Oct 10. 2023

              별가루

  나는 형제들이 좋다. 고추 농사엔  저릿한 내 형제들의 기대가 녹아있다. 

   

봄에  고추모종을 삼백 포기 심었다. 물과 햇빛, 공기를 받아먹고 마시며 아가들은 탈없이 자랐다. 대가 굵어지고 가지가 뻗기 시작했다. 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해가 되는 것은 이제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노릇도 못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양분을 막고 앉아있는 방아다리 아래 순은 다  훑어 버렸다.

  

얼마의 시간을 보내자 이웃 농장들에선 고추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밭에선 한 송이 꽃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를 궁금해하며 이웃 농장을 이리저리 다녀봤다. 그리 한들 우리 농장에서 안 나올 꽃이 나올 리 있을까만 몸은 자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를 태우던 어느 날  작은 별처럼 팝콘처럼  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작고 하얀 기적,  남편과 나도 작고 하얗게 웃었다.

 

작은 점 만한 연둣빛 열매가 맺혀 꽃을 밀어내 말리며 제 키를 키워갔다. 그것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부지런히 달려갔다. 이대로만 자라면 올 고추 농사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도할 즈음에 잎이 노랗게 말라가고 열매는 오그라들고 있었다. 왜 이럴까, 올해 고추 농사는 망치려나보다 당황하며 사진을 찍어 농사 전문가인 시누이 남편에게 보내 이러는 이유를 문자로  물어봤다. 그는 응애 벌레가 못살게 굴어 아파하고 있으니 응애 약을 쳐주라고 답을 보내왔다.

   농협에 가서 그 약을 사다가 뿌려주고 일주일 후에 보니 나무를 괴롭히던 벌레가 모두 소탕돼 잎과 열매가 다시 싱싱한 초록으로 야실대고 있었다. 이제 장마 때 많은 비만 오지 않으면 별 탈이 없을 것이다. 비를 많이 주고 적게 주고는 하늘의 소관이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를 너무 많이 내려줄 경우 탄저병이 몰려와 붉게 익은 고추들이 다 죽을 수 있다. 어떤 이의 말로는 탄저병이 들이닥치면 다 익은 고추들이 떨어져 쌓여 고랑이 온통 빨갛단다. 나는 그 상상을 하며 유난한 무더위에 헉헉대며 더위를 식혀줄 비를 기다리면서도 탄저병은 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우리의 기원을 하늘이 알았을까. 비는 많이 내렸으나 용케도 탄저병은 없이 잘 지나갔고 하루 햇빛에도 많은 열매들이 익어갔다. 그늘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니 일렬로 서있는 고춧대들이 누구 치마 무늬가 더 예쁘냐고 앞 다투어 묻고 있는 것 같다. “저 무늬 하나씩 따기도 아깝네요.” 빨간 고추무늬 치마를 입고 한 줄로 서 있는 고춧대를 바라보며 나는 농장 이웃에게 말했다.  


본격적인 고추 수확 시기가 됐다. 동이 트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니 이웃 농장에선 우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 소리로 부산했다. 뒷집은 다른 동네에 사는 가족들까지  다 나와서 고추를 딴단다. 나도 빈 사각 바구니를 앞으로 밀며 좁은 고랑 사이로 기어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위로 올려다보며 쪽가위로 똑똑 자르는데 모기가 자꾸 발을 물었다.  겁도 없이 양말도 신지 않고 슬리퍼 차림으로 들어온 게 잘못이었다. 모기를 무시하고 일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발등이 따갑고 가려워 고랑 밖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고춧대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기어 나와서 양말을 신고 슬리퍼도 장화로 바꿔 신고 다시 들어갔다.

   부지런히 따니 큰 바구니에 어느새 고추가 넘쳤다.  다 찬 바구니를 밀고 또 밖으로 나가서 빈 바구니 하나를 더 가지고 들어와야 했으나 나오고 들어가는 잠깐의 시간도 아껴야 할 만큼 내 상황은 급하다. 해가 올라와 비추면 피부 알레르기로 고생해야 하기에 그전에 몸을 빨리 놀려 최대한 많이 따고 농막 안으로 피해 숨어야 한다. 고추를 급한 대로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 담았다. 앞치마도 가득 차 더 담을 수 없게 되자 윗저고리의 양 가슴 주머니에도 꽂아 넣었고 바지 주머니로도 밀어 넣었다. 어느새 해가 올라와있었다. 그녀들을 품고 밀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먼저 그녀들의 몸에 묻어있는 흙과 먼지를 씻어주기 위해 넓은 다라에 그녀들을 넣어주고 물을 틀었다. 휘휘 저어주니 그녀들은 찰랑대는 물 위에서 간지럽다며 자꾸 밖으로 도망 나갔다. 밖에 있는 그녀들을 잡아 안으로  넣어주며 씻어 다른 용기에 옮겼다. 식초와 소다를 탄 물에 그녀들을 담갔다. 그대로 조금 두었다가 목욕수건 삼아 양파 망으로 하나하나 잡고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때를 밀어주니 그녀들은 시원하다며 좋아했다. 용기를 수차례 바꿔가며 자꾸 씻어주자 그녀들은 이제 귀찮아했다. 나도 힘에 부치던 터라 그만하고 그녀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샤워기를 틀어 물을 한 번 더 뿌려주고 나서 그대로 두었다. 여러 시간이 지나 물이 다 빠질 즈음 안으로 옮겼다. 마른 수건으로 하나씩 닦아 사각 채반에 차례로 뉘어준 뒤 건조기에 넣으니 새벽이 되었다.

   

   잠을 자며 깨며 일어나 온도를 체크했다. 그렇게 삼일을 보냈다.

   건조기를 열어보니 그녀들은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잘 말라 있었고 빛깔도 고왔다. 이 작업을 한 달 넘게 반복하는 동안 농막 안에는 반짝반짝 잘 마른 고추 봉지가 쌓여갔다. 밖에선 고추 꽃이 계속 피었고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열렸고 여전히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하며 자라고 있다. 이 건강한 순환은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저쪽 이웃이 정보를 주었다. 아직 익지 않은 저 많은 초록 고추를 빨리 붉게 하는 약이 있는데 그것을 주면 추워지기 전에 두 번은 더 딸 수 있다고. 그 얘기를 접하는 순간 나는 초록 고추의 비명 소리를 들었고 인간의 잔인성에 몸을 떨었다. 그 약을 먹고 억지로 익은 고추는 한을 품고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정보를 접수하지 않았다.

   

우리는 트럭에 마른 고추를 싣고 방앗간으로 달렸다. 깨끗하게 잘 빻는다는 방앗간은 농장에서 꽤 멀리 있었다. 한참을 가서 도착하니 이른 시간인데도 방앗간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고추를가지고 온 손님들로 시끄러웠다.

   조금 기다리자 우리 차례가 되었다. 고추가 첫 번째 기계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제 몸을 부수며 큰 별이 되어 나왔고 두 번째 기계에선 더 작은 별이 되어 나왔다. 마지막 세 번째 기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빨간 별 가루가 되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수개월 나와 함께 했던 그녀들은 백여 근의 별 가루 내게 안긴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애틋한 내 혈육들과 나누기 위해 형제 수대로 봉지를 꺼내 펼치고 나눠 담기 시작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가치였다.

     

별가루를 차에 싣고 다시 농장으로 달렸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아우, 나 눈물 나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남편은 운전만 할 뿐 말이 없고 강물 은빛 물결만 만들 뿐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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