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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Oct 12. 2023

                      가을 대지

   콩들이 웃고 있다. 울타리에 조롱대롱 매달린 채. 호박잎도 아직은 함박웃음이다. 그녀들을 부지런히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따지 않고 그냥 뒀다가 어느 날 밤 서리가 내려버리면 그녀들의 웃음은 바로 사그라질 것이기에. 다음날 아침 농막 밖으로 나가보니 무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어제 그녀들 따주기를 얼마나 잘했던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가을에 씨앗을 심어 여름에 수확하는 작물도 있다. 마늘이 그것이다. 통마늘을 하나하나 쪼개 상태가 좋은 것만 골라서 재를 풀어 넣은 물에 한 시간 담가 소독한 후 한쪽씩 땅에 심는다. 뿌리 쪽은 아래로, 뾰족한 쪽은 위로 향해 놓고 흙을 살짝 덮어준다. 이후 겨울 추위 속에서도 뿌리는 연둣빛 마늘 싹을 땅 위로 쏙 밀어 올린다.

   

이십여 년 전, 십여 명이 모둠으로 하는 성당 그룹성서 모임에 들어갔다. 그룹 지도자가 우리들에게 묵상을 글로 써보기를 권했다. 나는 늘 글 쓸 기회를 보고 있던 터라 그날로 쓰기 시작했다. 유년의 뜨락으로 처음 나가보았다. 그 뜰에 키 작은 내가 있고 부모님 안 계신 집 마당에서 혼자 올려다본 밤하늘의 공포가 있고, 많은 형제들이 모여 겨울 저녁에 수제비를 떠먹는 수저소리가 있었다. 글은 느닷없이 찾아와 나를 건드렸고 불현듯 눈물을 불렀다.

   

다른 그룹원들은 말로 풀어 나갔고 글로 써오는 이는 내가 유일했다. 지도자의 칭찬을 받았고 그룹원들도 잘 쓴다며 어디에 출품해 보라고 했다.


마침 신문 광고란에 원고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와 어느 날의 묵상 내용을 원고지에 옮겨 써서 들고 갔다. 내용은 우리 대가족 이야기였다는 것만 기억할 뿐  거기가 신문사였는지 출판사였는지, 동네는 어디였던가 기억에 없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 쪽으로 간 것은 확실하다. 사무실에 들어가 담당자를 찾았다. 외출 중이니 책상 위에 두고 가라고 옆 직원이 말했다. 원고를 놓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다. “놓고 가신 원고 읽었는데 쓰신 글이 전혀 아닌 거 아시죠?”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부화뇌동했던 걸 보면 그 시절 내 행동은 가벼웠다.

  

 성서공부 일 년을 마무리하고 다음 해에 지도자가 바뀌었다. 새 지도자는 글로 쓰기를 권하지 않았지만 쓰고싶은 욕구는 멈추지 않았기에 전처럼 혼자 써 가서 읽기를 계속했다. 이야기를 자주 풀어가다 보니 글이 점점 길어졌다. 어느 날 지도자가 작심한 듯 말했다. 제한된 시간에 여러 명이 얘기해야 하는데 세레나(내 세례명)씨 혼자 시간을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고, 앞으로 써오지 말고 간단히 말로 하라고 했다. 얼마나 무안하던지.. 그곳은 내 글쓰기 발표의 장이 아닌 게 사실이기에 나의 묵상 쓰기는 자연히 중단되었다.

   

그렇게 또 일 년을 마무리하고 다음 해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사막에서 맨발로 달리고 구르느라, 선인장 가시에 찔려 아파하느라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내 마음 한 번 보듬어줄 여유조차 없었던 십여 년,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내 문학의 홀씨는 그때 어디쯤에서 날고 있었을까. 세월은 흐르고 격랑의 시간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전선에서의 거친 싸움소리는 고요해졌고 어느덧 내 인생의 계절도 가을 안에 들어와 있다.  

  

 쓰지 않고 간단히 말로 하는 곳이 아닌, 아니 맘껏 쓰고 발표하라 마련된 대지가 여기에 있다. 넓게 펼쳐진 이 가을 대지에서 나 이제 문학의 씨앗 한 알 심어놓는다. 뿌리 쪽은 아래로, 싹이 틀 쪽은 하늘로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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