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울건너 Oct 15. 2023

                시월의 강

   내 삶의 시계는 시월을 가리키고 있다. 수다쟁이 영신 씨가 농장 이웃들을 초대했다. 저쪽 사거리 코너에 건물을 갖고 있는 그녀가 건물 꼭대기 층에 자신의 실내 놀이터를 마련했단다. 우리는 약속 시간에 맞춰 그곳에 들어갔다.  

   


실내는 넓지만 단아했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시월의 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오랜 염원이었던 혼자만의 시간 누리기를 실천하겠다고 선언처럼 말했다.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고 강물의 사계를 바라볼 거라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게도 오늘만 이곳 출입을 허락했단다. 오늘은 농장 남자들도 동반된 자리이기에. 그녀가 떡과 차를 내왔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이 들어왔다. 우리는 농장에서 영신 씨와는 교류가 잦았지만 그와는 오가며 가끔 눈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그는 우리가 앉아있는 탁자에 앉더니 회의를 주재하는 고위직 관리 같은 태도로 분위기를 끌고 갔다. 나는 마음이 영 언짢았다. 오지 말걸.

   

기분이 상한다고 사람을 바로 배척할 일은 아니다. 이곳 원주민인 그는 이 고장 동네이름에 대해서도 설명해 줬다. ‘울’은 개울을 뜻하는데 이 ‘울’ 자가 들어있는 동네엔 반드시 계곡이 있다고. 나는 예전부터 어디건 동네 이름 유래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동네 이름을 외우며 휴대폰 메모장에도 받아 적었다. 서래울, 바람울, 꽃치울.. 그의 손가락이 그 동네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더니 나가봐야겠다고 미안하다며 그가 급히 일어나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영신 씨가 우리의 마음을 아는 듯 그녀의 남편 때문에 불편했을 텐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회사를 오래 운영한 탓인지 누구에게든 지시하는 것 같은 태도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습관을 못 고치고 있다고. 회사 운영자라고 다 그럴까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했다. 나도 괜찮아졌다. 누구에게서 이 고운 정보를 얻겠는가. 모두가 진심으로 괜찮아져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웃농장 최 사장은 그의 아내 김 여사에게 그예 욕을 먹었다. 그는 그의 한쪽 밭을 임대해 짓고 있는 숙희 씨 부부에게 건네는 말이 늘 곱질 않다. 중간에서 불편해하던 김 여사가 오늘 아침 그에게 숙희 씨네 상황을 얘기해 줬다. 실은 숙희 씨 남편이 주 2회 혈액 투석을 하고 있는데 오늘 병원 가는 길에 심어놓은 김장배추를 둘러보러 여기 먼저 들를 거라고. 그리고 당부했다. 환자가 편한 마음으로 들어가 투석 받을 수 있도록 그가 오면 제발 좀 부드럽게 대하라고.

   잠시 후 숙희 씨 부부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최 사장은 풀이 이렇게 수북한데 뽑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서 부추를 갈라 심던 김 여사가 최 사장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우 저 등신, 기껏 얘기했더니!” 그 소리에 놀라 당황한 최 사장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김 여사가 숙희 씨 부부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며 앞 뒤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최 사장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숙희 씨 남편은 안 그래도 풀을 좀 뽑을 참이었다며 사람 좋게 웃었고 숙희 씨는 풀이 정말 너무 자라 있다며 어른이 한 말이니 괜찮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새들이 들깨를 쪼아 먹고 있다. 새들만큼이나 부지런한 숙희 씨가 감이 들어있는 상자를 가지고 들어온다. 강촌에 있는 그녀의 집 마당에 열린 대봉을 땄단다. 나는 냉동실에 있는 빵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고 커피를 탔다. 그녀는 여주 넝쿨 아래 탁자에 앉아 우리 밭을 둘러보며 고춧대를 다 뽑아내니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녀는 올 김장 배추농사를 끝내고 내년부터는 저 산 너머 동네로 옮겨가서 농사를 지을 거란다. 그곳에서 농사짓던 집안 어른이 연로해 숙희 씨 부부에게 지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넘기던 빵이 목을 막았다. 신혼 때부터 시부모와 이십 년을 같이 살다가 먼 길 잘 보내드린 그녀다. 나보다 어리면서도 속이 더 깊고 어른스러워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 터였다.

   

괜찮다. 준비 안 된 이별은 늘 있어왔으니까. 이미 안긴 사랑을 모른 채 흘려보내곤 나중에야 후회로 겪는 쓰라림보다는, 이렇게 알고도 다 못 나눈 채 헤어지는 사랑의 아쉬움이 더 낫지 않은가.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내년에 그녀가 문득 그리워지면 저 산 너머로 달려가서 보고 오면 되니까. 그녀와 가까운 이별인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 모든 이들과 먼 먼 이별을 맞이하게 될 날도 올 터인데..

   그녀가 배추 좀 살펴주고 친정어머니 뵈러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나도 일어나 그녀의 굵은 허리를 한 팔로 감으며 배웅을 했다. 다 괜찮은 시월의 강이 흐르고 있다. 달력의 시월도, 내 삶의 시월도 강물처럼 잘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전 14화 웃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