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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Oct 15. 2023

                  낙화유수

   비가 내린다. 고추 농번기도 지났고, 들깻대는 다 베어서 비닐하우스 안에 들여 놨고, 김장배추는 제 알아서 크고 있으니 모처럼 한가한 주말이다. 옆 농장 최 사장 부부가 우산을 들고 서서 농막 문을 두드린다. 오늘 저녁은 밖에 나가서 같이 먹잔다. 비 오는 한가한 주말의 유혹이 아닐까. 그들의 차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낙지 철판 볶음밥은 맛있었다. 네 명이 밥 세 공기를 주문해 철판에 볶았다. 맛있다 하면서도 배부르다며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조금만 먹고 수저를 놓았다. 그들은 정말 배가 부른 듯했다. 나는 아직 멀었는데.. 혼자만 숟가락으로 누룽지 긁어가며 먹기가 눈치 보여 아쉽지만 수저를 놓았다.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오며 남긴 밥과 고소한 누룽지에 미련이 남아 그것을 두어 번 돌아다 봤다.

   

밖으로 나오자 최 사장이 바로 귀가하기 아쉬운 듯 노래방을 가자고 한다. 그는 그의 아내가 노래를 잘 한다며 그녀의 노래실력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운동장 조회에서 앞에 나와 전교생 애국가 지휘도 했었단다. 그는 그녀의 노래 좀 들어보라며 정말 잘한다고 자꾸 얘기했다. 그는 우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길에 세워둔 채 근처 이층에 있는 노래방으로 올라가 방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우리를 불러 안내했다. 두 집의 가을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듣는 게 더 좋아졌다. 제일 연장자인 최 사장에게 먼저 마이크를 줬다. 그는 편안한 목소리로 옛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의자에 앉아 가사를 음미하며 호응했다. 우리는 캔 맥주를 조금씩 마셨다. 다음엔 김 여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박자를 계속 놓쳤고 고음에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음이 거기에 닿질 않았다. 음정도 박자도 최 사장에게서 들은 말과는 달랐다

   

조금 마시고 각자 처음에 앉았던 자리 앞 탁자 네 곳에 올려놓은 맥주 캔들을 남편이 끌어다 한 옆으로 몰아 놓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두 권의 노래 책을 펼치다가 맥주가 담겨있는 캔을 쳐서 넘어뜨릴까봐 그러는 듯 했다. 나는 놀라며 그의 팔을 잡았다. 자기들이 마시던 맥주의 위치를 알아야 또 들고 마시지 이렇게 섞어놓으면 어떻게 찾느냐고 김 여사의 노래 속에서 크게 외쳤다.

   

노래를 끝내고 마이크를 내려놓은 그녀가 한 손으로 자신의 앞 목을 고 흔들며 노래방엘 오랜만에 오니 목이 안 풀린다고 했다. 내 생각엔 풀리지 않는 목보다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삭아지는 그녀의 감각 때문인 듯 했다. 아직도 꽃처럼 예쁜 얼굴만큼이나 영롱했을 그녀의 노래 감각은 세월과 함께 흘러가고 있을 테니까.

   마이크가 저리로 그리로 오가며 노래는 계속 됐고 마스크를 쓴 노래방 여주인은 가끔 들어와 쉬고 있는 한 쪽 마이크의 커버를 갈아놓고 나갔다. 


누가 우리 유행가를 천하다고 무시하는가. 흘러간 옛 노래의 가사는 모두 한 편의 시인 것을. 학창시절에 가사 내용도 모른 채 비틀즈, 존덴버에 열광했던 격정과는 달리 이것은 가슴에 깊이 스미는 애절함이었다. 역시 우리 노래가 좋다며 의자에 앉은 채 나는 한쪽 팔을 들고 추임새를 넣었다. 남편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나는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라면 머리를 흔든다. 이겨낼 자신이 없어 싫다고 손을 내저으면서 지금은 무슨 미련과 아련함으로 지나온 젊음을 자꾸 돌아보고 있는지, 그리고 잡고 싶어 하는지.

   

노래는 이 절로 넘어갔다. 덩치 큰 최 사장이 새처럼 작은 김 여사를 안은 채 천천히 돌고 있다.


사십 여 년 전, 강원도 어느 고을에 대 지주의 딸과 어려운 집안의 아들이 서로 좋아했단다. 남자는 여자가 사랑스러워 그녀를 업고 산 아래에서, 손을 들면 구름이 달려가다가 그 손을 만져줄 것 같이 높이 있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더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포도를 많이 좋아해 한 알씩 따먹지 않고 아예 송이 채 들고 훑어먹는 그녀에게 그가 포도만큼은 듬뿍 사주었단다.

   

우여곡절 끝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졌다. 직장을 잘 다니던 남자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시공부를 하겠다며 직장을 나왔고 그때부터 여린 잎 같은 그녀가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가계를 꾸려갔다. 그들에게 아이가 둘 태어났고 첫 아이가 네 살 되던 해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누워 살았다.

   그녀는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 병 수발까지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큰 딸을 육교 위에 몰래 두고 내려왔다. 어느 집이든 가서 고생하지 말고 살라며.  작은 아이를 업은 채 육교를 내려와 걷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다시 육교위로 뛰어올라가 아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단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녀의 남편이 기적적으로 회복이 돼 일어나 직장을 다시 잡아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춤바람이 나서 밖으로 돌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태생적으로 타고 탄 호기를 그녀 제압용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당하면서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단다. 그녀는 또 다른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집을 여러 채 장만했고 남자는 주식을 해서 그 집을 다 날렸다. 그녀는 또 다른 일을 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고 그들은 이제 칠십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 있다. 지금 그들의 노후는 다행히 잔잔하다.

 

  지난 날 지은 많은 죄로 남자는 엄처시하에 살고 있단다. 아직도 그에게 남아있는 호기가 가끔 거친 말로 그녀를 향해 발동되면 그것은 그녀에 의해 즉시 초토화 돼버린다. 며칠 전에도 그가  다 버리지 못한 습관으로 밭에서 그녀에게 소리 질렀을 때 그녀가 호미를 들고 벌떡 일어나며 반격했다. “이 등신이 진짜 확!” 그가 놀라 황급히 도망을 가다가 살그머니 우리에게 와서 말했었다. 그녀에게 버림받을까봐 무섭다고.  그때 그는 아내를 몹시 두려워하는 낯빛이었다. 그녀는 이제 맘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단호한 여인이 되어있기에.  

   

   음악은 신기하다. 쫓겨날까 두려운 마음도 안정시켜주니까. 그는 지금 젊어서 다른 여자를 안고 돌았던 품에 김 여사를 안은 채 눈까지 지그시 감고 그녀를 리드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김 여사가 말했었다.“어쩌겠어, 이젠 젖은 낙엽이 돼서 나한테 안 떨어지려고 딱 붙어 있는걸... 내가 거둬야지.” 그녀는 내년 봄에 남편 데리고 시부모님 누워계신 산소에 갈 거란다. 그 아래에 그들이 세상 뜨면 들어갈 자리를 그에게 일러줄 거란다. ''여긴 당신 누울 자리 여긴 나 들어갈 자리'라고.

  

그들의 브루스 춤은 계속되고 낙화유수는 삼 절로 넘어가고 있고 나도 떨어진 한 장의 꽃잎으로 물결 따라 흘러가고 있다. 어머니의 유전자가 앉아있는 나를 일으키며 밀었다. 나도 마이크를 잡고 삼절에 동참했다.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며는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노래가 끝났으나 나는 잡은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빠른 노래로 바꾸며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래방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갑자기 빠르게 바뀐 박자에 적응 못한 그녀 부부는 천천히 돌며 추던 춤을 멈추고 어느새 자리로 들어와 앉아 웃고 있다. 얼마나 뛰었는지 숨이 차고 땀이 났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입력해 놓은 두 시간이 다 흘렀다. 그 고장 원주민인 그들과 절친한 사이인 노래방 주인이 여유시간을 더 넣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만 하자며 일어났다. 남자들을 계산대에 두고 그녀와 나는 노래방을 먼저 나왔다.

   

그녀는 목소리가 영 안 풀리더라고 겸연쩍어했다. 최 사장이 미리 자랑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 역시 박자를 놓치고 고음은 올라가지 못했지만 미리 자랑을 하지 않았기에 부담은 없었는데. 나는 그녀의 무안함을 얼른 덜어줘야 했다. 노래가 힘들었던 건 우리가 밥을 배부르게 먹은 게 원인일 거라고 말했다. 나도 노래 부르는데 배가 불러 숨이 차더라고. 다음에 그 식당에 또 가면 밥 두 공기만 시키자는, 내가 지키지 못할 다짐도 했다. 그녀도 동의했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다시 차에 태워 밭으로 데려다 주고 근처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뒤늦은 나이에 농장의 주말 이웃으로 시작한 그들과의 인연은 즐겁고 허무하다. 흐르는 세월의 강물 위에서 꽃잎으로 같이 떠가며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고 길지 않을 여생을 예감하기에. 웃음으로 한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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