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농장일기 15화

괜찮은 시월

by 개울건너

내 삶의 시계는 시월을 가리키고 있다.


저 네거리 집 아낙이 그녀네 밭 몇 고랑을 임대해 농사짓고 있는 서린씨네의 지금 상황을 그녀의 남편에게 얘기해 줬다. 서린 씨 남편이 초기이긴 해도 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이따가 치료받으러 병원 가는 길에 여기 심어 놓은 배추 둘러보러 들를 거니까 제발 좀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고, 왜 그들에게 그렇게 건네는 말이 늘 곱질 않느냐고, 내가 중간에서 몹시 불편하니 이번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잠시 후 서린 씨 부부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네 거리 집 남자는 풀이 이렇게 수북한데 뽑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서 부추를 갈라 심던 그의 아내가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우 저 등신! 기껏 얘기했더니.”

그 소리에 놀라 당황한 남자가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아낙이 서린 씨 부부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며 앞 뒤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서린 씨 남편은 안 그래도 풀을 좀 뽑을 참이었다며 사람 좋게 웃었고 서린 씨는 풀이 정말 너무 자라 있다며 어른이 한 말이니 괜찮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새들이 들깨를 쪼아 먹고 있다.

새들만큼이나 부지런한 서린 씨가 감이 들어있는 상자를 가지고 들어온다. 강마을에 있는 그녀의 집 마당에 열린 대봉을 땄단다.

나는 냉동실에 있는 빵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고 커피를 탔다.

그녀는 호박 넝쿨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우리 밭을 둘러보며 고춧대를 다 뽑아내니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녀는 저 네거리 밭에서 짓던 올 김장 배추농사를 끝내고 내년부터는 저 산 너머 동네로 옮겨가서 농사를 지을 거란다. 그곳에서 농사짓던 집안 어른이 연로해 서린 씨 부부에게 지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넘기던 빵이 목을 막았다. 신혼 때부터 시부모와 이십 년을 같이 살다가 시부모님을 먼 길 잘 보내드린 그녀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는 그녀의 남편과의 사이도 늘 잔잔하다.

나보다 어리면서도 속이 더 깊고 어른스러워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 터였다.



괜찮다, 준비 안 된 이별은 늘 있어왔으니까.

이미 안긴 사랑을 모른 채 흘려보내곤 나중에야 후회로 겪는 쓰라림보다는, 이렇게 알고도 다 못 나눈 채 헤어지는 사랑의 아쉬움이 더 낫지 않은가.

내년에 문득 그녀가 그리워지면 저 산 너머로 달려가서 보고 오면 되니까.

그녀와 가까운 이별인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 모든 이들과 먼 먼 이별을 맞이하게 될 날도 올 터인데..


그녀가 배추 좀 살펴주고 친정어머니 뵈러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나도 일어나 그녀의 굵은 허리를 한 팔로 감으며 배웅을 했다.


다 괜찮은 시월이 가고 있다. 달력의 시월도, 내 삶의 시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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