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울건너 Oct 15. 2023

주인 만난 호박들

   사회의 질서를 위해 우리는 도의를 지키며 살아간다.


연두색 금속 울타리를 경계로 두부모 모양의 텃밭들이 연이어 있는 여기 역시 농부들의 도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그러나 남몰래 욕심을 키우느라 그것을 잊고 지낸 올봄부터 가을까지 내 안의 질서는 꽤 어수선했다.  

   

늦은 봄, 왼쪽 울 너머 밭주인 영신 씨 부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와 호박 모종을 심었다. 어느 날 울타리를 타고 우리 집으로 넘어온 호박 넝쿨에서 작은 꽃 주머니를 밀며 콩알 만 한 호박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이게 잘 자라면 내가 따먹어도 된다는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오성과 한음의 설화도 생각났지만.

  

여름이 되었다. 넓은 잎으로 울타리가 울창해지니 호박은 숨어 지내기 좋았다. 그 집 부부가 나와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면 나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고 호박은 영리하게 처신했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제 몸을 잎 색깔 따라 연두에서 초록색으로 바꿔 칠하고, 이파리들은 호박에게 제 몸을 부채 삼아 흔들어 부쳐주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 늦여름으로 치닫으며 호박은 진초록 옷으로 갈아입고 크기를 키워갔다. 나는 살금살금 커 가고 있는 그녀를 살금살금 살피며 생각했다. 얘가 제 발로 넘어왔으니까 내 거지.

  

 바람 빛깔이 달라졌다. 가을바람이 살랑대고 호박이 노랗게 익어간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록 영신씨네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들은 작년에 시작한 포도 농사가 잘 되자 한껏 고무되어 초록 지붕의 작고 예쁜 농막을 지었었다. 그리고 여러 이웃들을 초대해 부추 전을 부쳐 내고 커피와 함께 자신들이 키워 성공했다는 포도도 나눠줬다. 그러나 올해 이상기온으로 포도농사에 실패하자 그들은 심드렁하더니 밭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들  부가 반  씩   나눠 심었던 저쪽 포도밭도 이쪽 야채밭도 뽑지 않고 방치해 둔 여름풀이 마른 채 서 있고, 지은 지 일 년밖에 안된 농막도 사람 온기가 닿질 않으니 폐가 수순을 밟고 있다. 김장 배추도 안 심은 걸 보면 그들은 밭에서 손을 뗀 게 분명하다. 나는 바다. 호박이 다 익을 때까지 그들이 나오지 않기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호박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남의 자식이 제 발로 담 넘어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왔다 해서 내 자식이 되는가.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게 확실할수록 들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더 선명해져 갔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저 밭이 어서 팔려 다른 주인에게로 넘어가기를.

   

가을이 깊어지자 소임을 다 한 줄기와 잎들은 말라가고 숨을 곳 없는 호박은 몸을 쉬이 드러냈다. 어느 노인이 이 늙은 호박만큼 경쾌하게 예쁠까. 샛노란 피부의 그녀는 배꼽을 들이밀며 함박웃음이다. 며칠만 더 있으면 농익어 당도가 올라갈 것이다. 나는 달달한 호박죽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이고  엉덩이 상할라, 스티로폼 박스 뚜껑을 가져다 엎어 땅에 닿아있는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받쳐주었다. 그리고 일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여기서 딱 일주일만 더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다음 날엔 일찍 일어나 새들에게 도둑맞고 남은 들깨를 털었다. 바짝 말라있는 깻대를 거꾸로 들고 막대기로 살살 두드려, 쏟아진 깨와 함께 섞인 검불을 선풍기로 날리고 깨끗해진 깨알을 자루에 담았다. 오후가 되니 이 집 저 집에서 깨를 터느라 분주하다. 깨 작업을 일찍 마쳐 한가해진 남편이 오른쪽 울 너머에 자리한 김 여사 네로 향했다. 우리보다 훨씬 많은 양을 심은 그녀 네는 깨를 우리처럼 막대기로 털어서 될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녀의 남편이 들깻대를 아예 길로 옮겨 눕혀놓고 도리깨로 치고 있다. 남편은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그와 함께 엇박자로 도리깨질을 시작했다. 나른해진 나는 맞은편 길 건너 명희네로 향했다. 칠십 년 가까이 지내온 세월이면 누군들 무슨 사연이야 없을까만 지난달 그녀가 우리 농막에 들러 차 마시며 자신의 얘기를 잠깐 비쳤을 때, 언제든 말라있는 그녀의 마음을 살살 간질이면 안에 담겨있던 이야기가 깨 빠져나오듯 우수수 쏟아질 거란 예감이 들었었다.  

   

 명희씨도 들깨 작업을 하고 있다. 키질로 검불을 내리는 그녀 옆에 쪼그려 앉아 검불에서 이는 먼지로 재채기를 했다. 키질을 끝내고 모아놓은 깨에서 말라 잘게 부서져 반짝이는 새똥을 같이 골랐다. 그녀는 강 위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 배를 타고 종갓집 맏며느리로 이 고장에 시집왔단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종 부리듯 함부로 해 놀랐는데 알고 보니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의 조부모집 머슴이었단다. 똑똑한 머슴에게 욕심 난 조부모가 그 머슴과 자신들의 손녀를 맺어 줬단다. 강 건너  그녀의 친정도 농토가 많아 농사를 지어보긴 했지만 요령 있게 짓는 방법은 시집와서 시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다. 나는 이 넓은 밭을 그녀 혼자 수월히 지어내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철부지라고 표현했지만 미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시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철부지 시어머니와 병든 몸으로 속까지 썩이는 남편과, 건강한 몸으로 백수인 시누이를 생각하니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세상이 한심해 울었단다. 지금은 시어머니도 남편도 세상 떠나 없고, 아직도 백수인 시누이는  돈 달라고 보채며 여전히 그녀를 성가시게 한단다.     

  

 나는 그녀에게서 글쓰기 소재를 마음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우리 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호박이 안 보인다. 여기 있던 호박이 어딜 갔나 안 보인다고 혼잣말을 하자 “줬지.” 도리깨질을 도와주고 먼저 돌아와 마늘을 눌러 심고 있던 남편이 무심히 대답했다. “누구를?” “주인.” “.....” 잠깐 들렀다가 급히 가려고 차에 시동 거는 주인을 불러 넘겨줬단다. ‘주인은 모르고 있을 텐데 뭘 불러서까지 주느라구...’ 그를 향해 힐끔거리며 밭을 서성였다. 그리고 쓴 맛을 다셨다. 호박이 떠난 자리엔 그녀가 깔고 앉았던 스티로폼 뚜껑만이 바람에 나부대고 있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호박이 앉아 나이 들어가던 자리를 습관처럼 바라보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김 여사 부부다. 그녀의 남편이 잘 익은 호박을 울 위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잡은 채 서있다. 나는 함박웃음으로 쫓아가 울 너머로 그것을 받아 안았다. 커 보이는 남의 떡에 눈독 들이느라 더 큰 내 떡이 그 집으로 넘어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서 역시 그리로 넘어가 달려있는 여주 몇 개를 사각의 울타리 구멍을 통해 우리 쪽으로 밀어 넣어주고 있다. 제 집 찾아 들어온 날씬이 여주들이 대롱대롱 줄기를 잡고 웃는다.           


이전 16화                   낙화유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