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대학생 시절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수준을 넘어 지갑이 모두 찢어진 가난한 우리 가족. 장남인 나는 학비를 벌며 대학을 다녀야 했다. 학자금 대출? 그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당장 3인 가족의 생계비가 없어서 소년가장처럼 '주경야독'했다. 정확히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했으니 '주독야경' 했다. 트럭으로 장사를 했다. 요즘은 '푸드트럭'이란 고급스러운 용어가 생겼지만, 예전에는 단 3글자로 불렀다. 그 이름 노! 점! 상!
닭꼬치트럭의 활동무대는 노점상 단속과 기존 상권의 텃새에 밀려 겨우 얻었다. "누구 허락받고 장사하냐?"는 조폭의 질문에 순진하게 대답했다가 어금니 빠질 뻔했다. 성북구청 노점상 단속 직원은 날 보면 대놓고 무시했다. 닭꼬치 트럭에 달린 자동차 바퀴보다 못한 바퀴벌레 신세. 사람대접받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꾹 참았다. 20여 곳이 넘는 곳에서 노점트럭을 운영하다 쫓겨난 지라 이 자리만큼은 사수해야 했다. 결국 산기슭에 있는 대학에 겨우 둥지를 틀었다. 수업을 마치면 북악산 밑으로 출근해 닭꼬치 가게를 운영했다.
자리를 잡았으니 맘 편히 장사할 수 있었을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슬프게도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장소는 이유가 있다. 둥지를 튼 곳은 유동인구가 적은 곳. 산 밑이라 사람보다는 새가 둥지를 틀기 좋았다. 장사 초기에는 파리만 날렸다. 하지만, 곤충을 싫어하는 내가 파리사냥의 주인공이 될 순 없었다. 파리는 그만 잡고 닭꼬치 트럭을 프랑스 파리처럼 힙한 곳으로 만들어야 했다. 미친놈이 되더라도 장사는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가게 홍보의 작전을 짰다.
닭으로 분장해서 캠퍼스를 미친놈처럼 뛰어다녀 볼까?
미친놈처럼 가게를 홍보하려면 팔딱팔딱 뛰는 자연산 가물치가 되어야 했다. 낯짝이 두꺼워야 하기에 선글라스 껴고 마스크로 신변을 보호했다. "튀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황색 앞치마에 닭벼슬이 달린 노란색 모자를 착용했다. 그리고는 대학 캠퍼스 안을 누볐다. 등과 배에는 "4시 오픈 정문 앞 닭꼬치"라는 광고카피가 있었다.
2005년 추운 겨울 똥차 트럭에서 장사하는 대학생 사장이야기가 '스포츠 조선' 신문에 크게 실렸다. 그 이후 며칠간 휴대폰에 불이 났고 여러 매스컴의 출연제의를 받았다. 당시에 유명했던 MBC 화제집중에 출연했고 SBS에도 방송됐다. 먹방이 흔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방송 출연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가 진행하는 TV토크쇼 제안도 받았고 여러 잡지에 소개됐다. 깨알자랑을 하자면 출연 제안받은 크고 작은 매스컴이 20곳이 넘었다. 이런저런노력 끝에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월 1,000만 원 버는 대학생 사장으로 유명해졌다.
출처 : MBC 화제집중
장사를 할 때 단골손님들에게 "비둘기 꼬치 아니에요?"라는 짓궂은 질문을 참 많이 들었다. 20년이 지난 만큼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인 만큼 지금 양심 고백한다. "나는 절대 비둘기 고기를 팔지 않았다. 다만, 비둘기 고기 맛이 닭고기 맛과 비슷하다고 하니 조심하시길!"
대학생 사장으로 이름을 날린 채 학교를 다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학생과 부모님은 행복에 겨워 웃느라 입이 찢어질뻔.
자존감을 상승시키는 아이템! 똥차 트럭
물고기는 물고기를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는다. 트럭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트럭의 주인. 그 차는 지금은 단종된 라보.라보르기니(라보와 람보르기니의 합성어)라고 불리는 2인용 트럭이다. 2인용 차는 보통 스포츠카라서 그 차를 스포츠카라 불렀다. 학교에도 그 꼬마트럭을 타고 다닌 덕에 인기스타였다. 물론 나에게는 꼬마트럭이 아니라 스포츠카였다.
안 타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앞자리에서 운전자와 조수석 탑승자의 축구 시합처럼 어깨싸움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2인승이라 실내가 정말 좁다. 좁은 것보다 최악인 것이 바로 전설의 수동 기어. 오토미션이라는 것이 당연한 시기에도 라보는 생산단가 절감을 위해 스틱이라 불리는 기어봉을 1~6단까지 조절하며 운전해야 했다. 스틱 운전이 지금은 생소하지만, 시내에서 길이 막히면 클러치 밟다가 왼쪽 무릎의 도가니가 나간다. 젊은 청춘의 나이에도 도가니가 저렸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는 자동차를 끌고 등교하면 연예인급으로 인지도가 올라갔다. 그 이유는 학부생 주차가 안 됐기 때문. 학부생 중 딱 2명만 차를 몰고 다녔는데 수입 SUV를 타고 다닌 내 동기와 나였다.(동기는 부잣집 아들로 학교에 발전기금을 거하게 내고 무료 주차혜택을 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반면, 어릴 때부터 말발이 좋았던 나는 주차 관리 총괄 소장을 찾아가 정기 주차권을 얻었다. 설득의 근거는 아래와 같았다.
"고학생입니다. 누가 대학교에 이런 차 끌고 오겠어요? 생계형 똥차 트럭이니 제발 정기 주차해 주세요. 학교 앞에 주차할 곳이 없어요" 닭대가리 모자 쓰고 가게를 홍보할 만큼 철면피였기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닭대가리처럼 단순하게 머리를 들이밀고 해결했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을 키우다 EBS만화 '꼬마버스 타요'를 보았다. 그곳의 나의 스포츠카 라보르기니와 닮은 차가 나서 내심 놀랐다. 이름이 '으랏차'였는데 이름만큼이나 깜찍하다. 나의 라보르기니와 으랏차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출처 : 한국지엠(좌측), EBS 꼬마버스 타요 (우측)
어려서였을까? 그땐 트럭 타고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부모가 사준 수입차 끌고 다니는 동기도 부럽지 않았다. 친구들과 MT를 갈 때도 타고 다녔고 친척 집에 갈 때도 그 차를 탔다.장사로 성공한 대학생 사장 스펙은 지하실에 있던 내 자존감을 꼭대기 테라스로 상승시키기에 충분했다. 학업과 동시에 장사를 병행하며 수업도 안 빠졌고 학점도 우수했다. 안경 벗은 뽀로로를 상상할 수 없듯 트럭을 빼고 나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트럭은 내 캐릭터였다.
대학생이 트럭을 타면 워낙 개성이 강해서 학교에서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남눈치 안 보고 당당히 주차장에 주차했다. 누가 봐도 상관없었다. 난 대학생 사장이니까. 1만 2천 명의 학우들 사이에서 트럭을 타고 등교하는 남자는 핵인싸 그 자체였다. 2인용 스포츠카가 왜 그리도 자랑스러웠을까? 남들이 안 하는 일에 도전하고 나만의 인생을 멋지게 살기 때문 아녔을까?
20년 전 '과거 똥차'와 '현재 똥차'의 차이?
추억팔이를 잠시 뒤로 하고 현재로 돌아온다. 똥차 실험을 연재하며 내가 몰았던 여러 자동차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재밌는 건 중간이 거의 없었다. 똥차 아니면 좋은 차였다. 승차감이 좋기로 소문난 대형 세단도 타보고 탱크가 밟아도 안 부서진다는 안전한 차도 타봤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는 '에어서스펜션' 달린 물침대 같은 독일산 플래그십 자동차도 몰아봤다. 최근에는 야외주차장에 차를 대면 누가 볼까 도망치기 바빴다. 액션배우처럼 차에 몸을 가린 채 허리를 숙이고 뛰었다.
여러 가지 질문에 자문 자답해본다.
대학생 시절의 똥차와 지금의 똥차는 무엇이 다를까? (답변 : 사회의 때가 묻긴 했다)
닭꼬치 트럭은 자랑스러웠는데 파란색 중고 똥차는 왜 부끄러울까? (답변 : 나이가 불혹을 넘기긴 했다)
좋은 차 타고 싶은데 현실은 파랑새라는 똥차 다니 슬픈가? (답변 : 슬프지만, 자동차 마니아이긴 하다)
라보르기니가 그립다. 가난을 탈피하고 배가 부르니 추억이 나를 부르나?
TV를 시청하다가 신세계 그룹의 정용진 회장이 시장에서 상인과 대화하는 영상을 봤다. 상인이 정용진 회장을 몰라보고 "뭐 하는 분이세요?"라고 물었는데 정용진 회장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네 저 장사해요"
정용진 회장을 몰라본 상인도 재밌지만, 날 몰라봐도 상관없다는 식의 정용진 회장의 답변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신을 몰라보면 의외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