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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문 글지기 May 27. 2023

비와 커피와 신록의 산

오월의 비 오는 휴일에 즐기는 한가로움

이른 아침에는 선명하던 산의 모습이 구름에 싸여 윤곽만 희미하게 보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창밖 산의 모습을 휴일의 한가로움과 함께 즐기고 있다. 저기 산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직접 보이지는 않고, 희미한 모습으로 존재감만 느낄 뿐이다.


산을 보면 그저 오르고 싶었고, 정상을 밟아야만 산에 오른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바라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바라며, 그저 바라보며 만족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세월 따라 약해져 가는 몸의 변화를 반영한 것인가, 그저 관점이 달라진 것인가.


빗줄기는 계속되고 있지만 집 앞의 가로수와 가까운 뒷산의 신록을 보는 것까지 방해하지는 않는다. 은행나무의 잎들은 크기는 모두 자란 것 같은데, 아직 연초록의 색깔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위에 빗방울을 받고 있으니 더 곱게 보인다. 


나무 아래에서 올려 보는 모습과 창밖으로 내려 보는 모습은 느낌이 다르다. 특히 비 오는 날 약간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상당히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겨울에 앙상한 가지에 눈이 쌓이면 애처로워 보였는데, 이 비가 나무에게는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책을 마주하기 전에 커피를 한 잔 준비한다. 아들이 사다 준 커피가루를 병에 넣고, 다시 그 병을 냉동고에 넣고 보관하고 있다. 비교적 장시간 보관하더라도 향기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여 실천 중이다. 그래서인지 준비하는데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더라도 향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오월의 비는 그저 조용히 내리고, 창을 열어도 시원한 바람만 들어 올뿐 빗방울이 날려 들어오지는 않는다. 커피 향에 가려서 신록이 주는 나뭇잎의 내음은 맡을 수 없겠지만, 둘 다를 한꺼번에 만끽하고 있는 기분이다.


오월의 가느다란 비에 씻긴 신록의 나무가 창밖에 있고, 나는 커피 향을 느끼며 책상 앞에 있다. 진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읽을거리를 준비하고 시간의 흐름에 애태우지 않아도 되는 휴일의 한 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사실 나는 커피를 잘 모른다. 대화를 위해 중간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커피를 우선 찾게 되지만 그것의 종류를 크게 가리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봉지에 담긴 ‘삼박자 커피’도 좋고, 병이나 캔에 담긴 커피도 마다하지 않고 마신다. 수많은 브랜드의 커피가 있지만 구분도 잘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커피의 향만으로 브랜드를 맞추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면 가능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분의 커피 취향이 해당 브랜드에 익숙해져 있어서 향기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내는 것인가. 그렇다고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커피 바리스타 과정의 온라인 강의를 몇 가지 들었었다. 나름대로 커피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진 분들이 하는 강의여서 무척 흥미로웠다. 커피의 종류와 역사, 산지에 따른 특성까지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서 분명 지식의 폭을 넓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덕수궁의 카페에서 메뉴에 적힌 ‘양탕국’이 고종황제께서 즐기던 시절이 커피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잠시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분께서 사시던 곳에서 마시는 기분을 잠시 생각해 보았을 뿐 커피의 맛과 향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나면, 직원들의 바쁜 일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된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으로 강사들이 설명하는 커피 맛과 향의 차이를 알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바디감이 무겁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다.


그래도 커피와 함께하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직접 내린 커피 잔을 들고 앉아 있는 지금의 시간이 좋고, 향기가 좋고, 잔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온기가 좋다. 그리고 한가로운 시간에 창밖의 비를 보면서 먼 산의 아스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지금의 여유가 좋다.




빈 잔의 허전함은 신록의 푸르름으로 채운다. 빈 잔의 온기는 식어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고, 활자를 보는 중간중간에 눈을 들어 바라보는 신록은 맑은 모습으로 한결같이 대해준다.  비가 나와 신록의 나무 사이를 더 가깝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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