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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쁘게 Aug 28. 2024

여자의 '적'은 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따돌림을 당한 어이없는 이유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남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여중과 여고를 나온 나는 중학교 2학년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왕따를 당했다. 지금부터 그 이유와 과정을 적어보려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90년대였다. 수도권 쪽 아이들은 고입시험인 연합고사나 중학교 야간자율학습, 체력장, 먹을 것이 없어서 점심, 저녁을 굶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볼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기에 말이다. 물론, 현재 2000년대 이후의 출생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지역의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신기하게도 한 명도 없었다. 가난한 동네였는데도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점심을 싸 오지 못하고, 저녁도 가져올 형편이 되지 않아서 야자도 하지 않고, 인문계 고등학교는 일치감치 포기한 아이와 짝이 되었다. 당시 나는 부모님의 덕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고, 엄마가 요리솜씨뿐만이 아니라 손도 크셔서 많이 나눠먹으라며 매일 고기반찬과 밥, 5가지가 넘는 반찬을 2~3인분씩 싸주셔서 반 아이들에겐 당연히 인기만점의 점심 동기였다. (이런 아이들을 친구라고 칭하기엔 친구라는 단어가 그들에겐 너무 과분하기에 친구란 말은 사용하지 않으련다.) 내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짝 그냥 엎드려 자는 것을 몇 번이나 봤었기에 둘이 따로 있을 때 조용히 물어보았다. " 혹시 나랑 밥 같이 먹지 않을래? 싫으면 말해도 돼. 난 항상 밥이랑 반찬을 많이 가져오고 다른 아이들도 밥 먹을 때만 친한 척 와서는 반찬만 퍼가니.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고 같이 밥을 먹고 싶거든. 수저 하나만 더 가져오면 되는데, 혹시라도 기분이 나쁘거나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돼."라고 말했더니 당시 내성적이던 짝은 작게 미소 지으며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매점에서 나무젓가락을 구해와서 나와 같이 먹던 아이들과 짝과도 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 뒤 학생들끼리 학급 회의를 시작하더니 항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익명을 위해 쪽지로 건의사항을 집어넣어서 학급회의를 했는데 내 얘기가 나왔다. " 지가 뭔데 잘 사는 척 잘난 척하면서 사람 자존심을 짓밟으며 착한 척은 다하고 있냐. 왜 지맘대로  사람을 동정하나. ㅇㅇ 이도 자존심이 있다. 그런데 쟤는 사람을 무시하고 동정까지 하고 있다. 우리는 뭐 괜히 가만히 있는 줄 아나. ㅇㅇ 이가 얼마나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모른 척하고 있는데 지가 뭔데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 게 왜 잘난척하면서 밥을 주는데?" 란 의견을 읽고 주제로 쓰고서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손을 들고 내게 공격적이고 서슬 퍼런 날이 선 말들을 쏟아부었다. 더 당황했던 것은 좋다고 승낙했던 짝에게 먹잇감을 노리는 승냥이와 같은 100여 개의 눈이 모이자 " 너 쟤가 주는 밥 안 먹고 싶은데 지가 착한 척하려고 네게 밥 주는 거 억지로 먹는 거지? 너도 자존심 많이 상했지?"라고 물어대니 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배신감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라 불렀던 아이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나에 대한 선의와 진심을 모른 척하였다. (이미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들과는 얘기를 나눴었고 그 친구만 좋다면 그렇게 하자며, 좋은 생각 했다던 아이들이었다.) 게다가 1학년 때부터 내 반찬을 얻어먹으려 꼭 나랑 밥을 먹으려 하던 일명 일진 따까리였던 '현정ㅇ'라는 아이는 "쟤는 1학년 때도 지가 무슨 정의의 사도인 척 내가 별거 아닌 장난쳤는데, 하지 말라고 내 멱살을 쥐던 년이야."라는 것이다.(그것도 1학년 때 대 빗자루로 학교 길목을 쓰는 청소당번을 하는데, 긴 나무 손잡이 끝 부분으로 아이들에게 '똥침'이라는 명칭의 항문을 찌르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했었다. 아이들은 그만하라 화를 냈고, 나도 몇 번 당하며 그만 좀 하라고 달래도 보고 화도 내봤으나 말로는 통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속 됐을 때, 다른 친구들과 내게 또 장난을 치다가 나와 몇몇 아이들이 꼬리뼈를 잘못 맞았고 아파서 주저앉아서 우는 아이들도 있고 나 역시 눈물이 핑 돌면서 너무 화가 나서 미안한 표정조차 짓지 않고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고 있는 그 아이를 똑같이 대빗자루로 후려치고 싶었지만 당시 폭행은 정학이나 퇴학까지 행해지던 때이기에 때리지 않고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 그만 좀 하라고, 너 때문에 여럿이 다쳤고, 다들 계속 그만하라고 했는데, 넌 니 재미만 위해서 사람을 괴롭히냐. 너도 당해볼래?"라고 소리 지르니 다른 친구들도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냈었다. 그때 나는 후일을 생각하지 말고 '현정ㅇ'의 머리통을 빗자루로 속 시원하게 후려쳤어야 했다. 그랬어야 내게 겁이라도 나서 더 이상 그러지 못했을 테니까. 그 이후로도 그 아이의 그런 저속한 장난질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유도 없이 자기 멱살을 쥔 년이라 손을 봐줘야 한다며 일말의 양심도 없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점심과 저녁, 간식등을 얻어먹으며 내게 치졸한 복수심을 키우고 있었고 , 2학년 일진 모임에 한번 손봐달라고 얘기를 했는데, 나와 친했던 정말 일진 최고였던 1학년 때 동기들은 그 아이를 잘 알았기에 들은 척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나를 모르던 그 밑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붙어서 "오늘이 니 제삿날이야." 라며 화장실로 나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선 자기는 그 아이들 뒤로 쏙 숨긴 채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그 일진 무리 중 한 아이인 '박근ㅇ'라는 아이는 자기는 '이유 없이 그냥 싫은 년은 그냥 싫다. 난 그런 것들을 없애버려야 사는 사람이라.'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아이들일 뿐이다. 아이이기에 어려서 그렇다.' 라는데 난 지금도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잔인하다는 것을 매우 잘 안다. '당장 지나가는 사람을 죽여도 촉법소년이라 벌을 받지 않는 나이.'라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법원을 들락거리며 재판에 서고 겨우 반성문이나 쓰고 봉사활동이라 하는 것이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기에 말이다. 물론 모든 사춘기의 아이들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조금만 살짝 비틀어진 생각을 할 경우 한없이 잔인무도해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너무 큰 배신감과 선행으로 몰래 하려던 일이 오히려 수치스럽고 미안해해야 하는 죄책감으로 돌아왔기에 "선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선행이란 것을 할 주제가 되지 않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라고 나를 나무랐다. 나를 몰아가는데 일조한 짝에게 그냥 말도 섞지 않고 짝이 바뀌길 바라며, 나를 공격할 때 아무 말도 안 했던 아이들과 밥을 먹었다. 더 웃긴 것은 그렇게 내 욕을 하며 잡아먹을 듯이 난리를 친 그 아이들은 어땠을까? 밥도 싸 오지 않고 내 옆에 앉아서 언제 그랬냐며 내 비위를 맞추며 반찬을 달라며 아부하며 애교를 부리고 얻어먹고 갔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었던 '정영ㅇ'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은사분들 몇 분의 존함도 있지만, 이 사람은 선생이란 호칭조차 아까운 사람이었다. 사회를 가르쳤고, 나이가 꽤 있는데도 결혼해서 아이가 없는 사람 이어서일까? 아이들을 사랑하지도, 융화시키지도 못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데 더욱 일조하였고, 촌지와 명품 립스틱까지 직접 요구하고 챙기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는 " 너 왜 니 짝에게 점심을 안 나눠 주니? 너네 집이 풍족하고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네가 1인분을 더 싸와서 그 친구에게 점심을 나눠줘라. 너희 어머니께도 내가 전화드렸다. " 그래서 나는 변명이랍시고 " 선생님 저는 그럴 생각도 그럴 수도 없어요. 점심 저녁 도시락 2개를 싸 오는 것만으로도 책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거절하자,  " 며칠 전 학급회의에서 아이들이 너를 공격한 것 안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걱정 말고 밥이나 싸와." 라시는 게 아닌가. 당시에 선생님들에게 지급되는 식권이 있고, 집안이 힘든 아이들에게 자신의 식권을 줘서 같이 먹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그것이 아까워 내가 당연히 해야 한다는 듯이 내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 시골지역은 선생님이 왕이고 그의 말이 법이었기에 가정별로 호구조사표를 돌리고 부모님의 직업이 좋다면 당연하단 듯이 촌지를 요구했다. 물론 그런다고 잘해주거나 특혜를 주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부모님에게 돈과 선물을 받아낼 인질일 뿐이었다. 불려 갔다 돌아온 후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이것들이 너희들이 뭘 해준 게 있다고 밥을 줘라 마라 명령을 하고, 화를 내?" 라며 소리를 지르시며 주동자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물었다. " 그럼 네가 ㅇㅇ 이 점심 싸 올 거야? 너 매일 그럴 자신 있어?"라고 물으니 다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보며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며 자신들은 못싸온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지나가는 하루 중의 하나였을 뿐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일이 가슴에 박혀 아파하고 있다. 지금도 너희들이 저지른 일들로 가슴에 못이 박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고 표현하면 그 아픔의 정도를 상상이라도 해 볼 수 있을까?  선생님은 짝에게 "ㅇㅇ이 네가 말해봐 먹을 거야 말 거야?" 묻자 짝은 기가 막히게도 "먹을래요."라고 답한다. 그럼 다 해결됐다며 선생님이 정한 거니 건방 떨지 말고, 건방을 떨고 싶으면 니들이 해주란다. 종례가 끝나자 당연히 아이들은 내가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했다고 생각하고 내게 욕설이 퍼부어졌다. "아까 너 교무실에서 나오는 것 봤다."며 내게 "고새 담임에게 일러바치러 갔냐!"라고 욕을 해댔다. 난 너무 억울하여 " 선생님이 나를 먼저 부르셨고, 오히려 내가 가방이 무거워서 가져오지 않겠다고 했는데, 일방적으로 내게 명령하셨다."라고 얘기했지만 어느 누가 믿겠는가? 결국 도시락만 싸와서 밥이나 주는 왕따가 시작되었다. 더 치사했던 것은 일면 중립을 지켰다는 아이들은 자신들까지 따돌림이 시작될까 봐 나와 아는 척도 대화도 하지 않았다. 집에 갈 때 교문을 나서고 나서만 제외하고 말이다. 여자아이들의 왕따는 남자아이들의 왕따와는 결이 다르다. 남자들은 그냥 주먹다짐 한놈만 잡고 한 번 이기면 싹 모든 게 끝나지만 여자아이들은 아무리 힘으로 이겨도 그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들의 괴롭힘은 교묘하고도 악랄하다. 수업시간에도 일부러 비웃으며 킥킥거리게 내게만 들리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나에 대한 욕설을 해댄다. 화장실에도 쫓아와 밖에서 들리게 욕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지나갈 때 툭툭 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고 책이나 체육복, 실내화를 훔쳐가고 찢어대거나 낙서를 해댄다. 내 도시락을 훔쳐다 쉬는 시간에 몰래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내게 도대체 이런 일들을 왜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당연히 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중3 때 봐야 하는 연합고사 때문에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야자를 해야 했고, 소위 인문계 고등학교를 많이 보낸다는 명문 공립중학교였기에 학원을 다닌다고 해도 야자를 빼주지 않고, 학원을 간다고 하면 학교 선생님을 무시하는 건방진 년이라고 벌을 주고 체벌하는 학교였다. 3M 주황색 귀마개는 몇 년간 내 귀를 막고 있는 내 신체의 일부였다. 귀마개를 껴도 아이들의 악의적인 말과 시선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당시 부모님 역시 바쁘시고 엄했기에 내가 왕따를 당한다고 쉬이 말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런 사실들을 얘기하고 전학을 보내주면 안 되냐고 했지만 엄마는 생각해 보자며 아버지에게 얘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말했고, 결국 다음날 아버지는 내게 "집에서는 동생들과 그리도 말이건 행동이건 잘 싸우고 잘 때리면서 학교에선 왜 못 그러는데? 가서 동생들과 싸우듯이 죽기 살기로 두들겨 패고 싸워라. 학교 처벌은 내가 책임질 테니. 집안 장군이냐? 똥개들이 꼭 집에서 짖고 밖에서는 끽소리 못 낸다." 라시니 두 동생들이 킥킥거리며 비웃는다.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흘렀다. " 어디서 뭘 잘했다고 우는데?" 라며 야단을 치셔서 밥한술도 뜨지 못한 채 울음을 참고 눈물을 닦고선 등교를 준비했다. 아버지가 출근하신 후 나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집이 떠나가라 울면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항상 비밀 지키겠다고 하더니 바로 얘기해서 다음날 이렇게 혼나는 게 한두 번이야? 동생들 앞에서 망신을 주고 무시를 당해야 엄마 마음이 편하냐고. 엄마는 내편이 되어줄 수 없냐고?"

하지만 엄마는 어디서 버릇없이 아버지께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내게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를 지르냐며 말씀하셨다 " 전교 1등 해봐. 그럼 너 왕따 시키던 것들이 전혀 못 그럴 테니. 네가 어중되게 반에서 겨우 5등 안에나 드니 그런 취급을 받는 거지. 엄마도 고등학교 때 따돌리려던 아이들이 내가 전교 1등 하고 장학금을 받으니 내 앞에서 끽소리도 못했어. 그리고 참고 견뎌.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그게 이기는 거야."라고 하셨다.  살고 싶지 않아서 참다가 겨우 얘기를 꺼냈는데, 담임 선생님도 이 일을 자신이 만든 것을 알면서도 엄마에게 학교에 오시라며 촌지를 요구하시더니, 자기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단다. 아마도 촌지를 받아내기 위한 미끼로 나를 선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담임이 내게 만들어준 것은 아이들의 더 심한 반발과 괴롭힘뿐이었다. 당시에 살던 아파트 내 방에는 벽장형 옷걸이가 있었다. 방문과 같은 문을 열면 아파트 벽에 견고하게 붙어있는 스텐봉이 딱 보였다. 그렇게 두 번 자살 시도를 했다. 기억이 정확지 않지만 스카프였나 보자기였나 눈에 띄는 천으로 스텐봉에 걸어서 내 목에 묶었다. 처음엔 숨이 막히고 머리가 터지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다가 운이 좋게도 매듭이 풀려 버렸고, 두 번 째 시도에서는  용기가 부족해서 내가 손을 놓아 버렸다. 당시에 자살 시도를 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으면 그들이 내게 행한 악행을 반성하지 않을까?'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 아이들은 내가 죽었어도 잘 죽었다고 하지 단 한 명도 반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악마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생을 마감하게 되면 차라리 장기 기부라도 해서 여러 명이라도 살리고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악마들은 아마도 자신의 자랑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내가 사람도 죽인 사람이야. 걔 내가 죽인 거다. 니들은 내덕에 그년 안 봐서 좋은 거야, 내게 감사해야 해."라고. 

 그 악마들의 예측가능한 말들이 나의 과도한 상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설마 그랬을라고? 사람을 너무 사람을 나쁘게 보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다른 예를 들어본다. 예전엔 지방에 장애인 학교가 거의 전무했다. 그래서 장애아들이 반에 한 명 정도씩 있었고, 우리 반에 있는 장애인 친구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춤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던 착한 아이였다. 지적 장애였고, 수업시간에도 따로 방해를 주지 않고 조용하던 초등학교 1학년 수준 정도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나를 괴롭히던 아이 중 하나인 '박근ㅇ'라는 아이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가 이 반의 악의 주동자이었기에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룰라"라는 그룹의 "날개 잃은 천사."의 춤을 쉬는 시간마다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골반을 때리는 그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에는 그 악마가 연예인처럼 보였던 것 같다. 춤추다가 심심하면 선생님의 나무 몽둥이로 아이의 가슴을 찌르거나 더듬으면서 말했다. " 병신년도 느끼냐? 병신년아 뭐가 느껴져? 기분이 좋아?"라 말하며 아이에게 성추행을 했지만 아무도 말리거나 막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매우 관대한 아이들이었다. 그녀의 성추행은 도가 넘어서서 말려야 할 지경이 되었는데, 몇 달 후 담임이 종례시간에 카세트를 한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장애인 친구의 어머니께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딸 좀 잘 부탁한다 하시며 카세트를 사주셨다고 한다. 당시 그 아이의 집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와 그 아이 셋이서 힘들게 살고 있으며, 어머니께서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셔서 형편이 넉넉지 않다고 담임이 얘기했다. 그러니 카세트가 그 집에서는 굉장히 힘들게 마련한 물건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이들이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딸이 얘기했고 아이들이 장난을 조금 치는 것 같은데 멈춰달라고 부탁하셨단다.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성추행은 도를 넘어섰고, 아이를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면 그 순수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네가 그런 짓하면 하지 말라고 말하랬어. 싫다고 말하랬어. 그러면 안 그럴 거라고. 근ㅇ야, 하지 마. 난 네가 정말 좋아."라고 어눌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했다. 보고 있던 나조차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악마보다 더한 아이는 "병신년이 어디서 날 좋아한다고 말해?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라며 아이에게 발길질들 하며 때리고 침을 뱉었고 결국 그 아이가 휴학을 하게 만들었다. 그 후 악마보다 더한 그녀는 " 내가 그렇게 해서 병신년이 그만둔 거야. 니들은 내게 감사해야 해. 그냥 보는 것조차 재수 털리던 년이었다고." 말이다.


 2000년대에 싸이월드라는 미니 홈페이지가 유행했었다. 대학생이 된 후로 갑자기 그 악마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현정ㅇ'는 비키니를 입은 사진을 올려뒀고, '박근ㅇ'는 한복사진을 입고 임신사진을 올려뒀다. 그러면서 써둔 대문의 글이 악마인 그녀가 변함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녀가 쓴 대문글은 " 난 한번 싫은 것들은 이유 없이 그냥 싫다. 난 그런 것들을 그냥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  그 대문 글을 읽으면서 참, 자괴감이 느껴졌달까? 악마보다 더한 것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어린 한때의 치기로 치부하기엔 여전히 악마 같은 생각을 실천하며 인생을 살고 있구나. 어떻게 저런 악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을까? 결혼한 그 사람도 동류이기에 그 악마와 결혼한 것일까? 저런 악마가 낳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클까? '인과응보.'란 것은 그냥 단지 사자성어인 옛날 단어일 뿐이구나. 다행이라면 나는 아이가 없기에 그녀의 자손들과 내 아이가 만날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였다. 그 당시 중립을 지키며 그나마 후에 내편을 들어주고 나에 대해 좋게 얘기해 주던 아이들은 중3이 되고 나서 나와 마주치거나 지나갈 때 그때의 미안함을 응원으로 덜어주곤 했다. " 방송에서 너 모의고사 0등 한 거 들었어. 너무 축하애. 난 너 잘할 줄 알았어. 중2 때도 잘했었잖아."  연합고사가 끝난 후에도 " 너 만점 받았을 것 같아. 잘 봤지? 난 그리 잘 보지 못했는데 어쨌든 인문계 합격은 했어." 라며 같이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방방 뛰어주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더 기막혔던 것은 1년간 내 점심을 먹던 그 짝이 가끔 마주칠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기쁘게 인사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난 너무 화가 나서 그녀에게 같이 인사해주진 못했다. 오지랖을 떨지 않았다면 평탄한 중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란 후회를 하곤 했다. 당시 친구랍시고 하교할 때만 같이 가주던 아이는 내가 중3이 되고서 방송에서 몇 등 했다고 나올 때마다 네가 잘하는 범위라서 잘 본 것이라며 교만해지지 말라 충고하더니,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 후 내게 전화가 와서 만나자며 울기 시작했다. 세 명이서 다니다가 두 명이 자기가 없는 날에 갑자기 친해져서는 자기를 따돌리고 밥도 먹어주지 않더니 아이들이 자기를 다 따돌리고 왕따를 당한다며 울었다. 그러며 말했다. "너도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미안하다. 나까지 당할까 무서웠어. 그래서 그냥 내가 안 당하니 다행이다. 타깃이 너였기에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어. " 나는 말했다. " 난 그때 두 번이나 자살하려 할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 네가 내편이 돼서 나랑 단둘이 다녀줬다면 그럼 너도 나도 왕따는 아니었잖아? 그런데 넌 그래주질 않더라. 난 그래줄 수 있었는데. 네가 지금 우리 학교라면 내가 네 편이 돼 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참고 잘 견뎌보자는 위로 밖에 없다. 위안이 되진 않겠지만 너도 나도 힘내서 몇 년 뒤 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웃으며 얘기하자."

  

 난 아이들이 질풍노도의 중2 시절이 지났기에 소위 그래도 공부를 잘해야 간다는 인문계에 왔고, 머리도 커져서 충분히 이성적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더 이상 왕따라는 것은 없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모두 철이 드는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이가 들 수록 지혜는 늘어가지만 마음은 좁아진다고 하는 옛 말이 맞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고2 때 제비 뽑기로 짝을 정했다. 아이들이 내년엔 고3이라 성적에 점점 예민해지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 저녁시간에도 공부를 하기 시작할 때였다. 반마다 시끄럽고 공부하지 않는 아이가 있는 것은 당연했고, 나는 맨 앞자리가 방해받지 않고 선생님을 독대하며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자리란 것을 알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앞에서 떠드는 것보다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더 신경 쓰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앞자리를 원하는 아이들끼리 4 분단까지 8자리가 있는데 지원해서 자리 뽑기를 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작년에 같은 반에서 올라온 게 나까지 세명이었는데 그 둘은 절친이었고, 그 둘과 제일 목소리가 크고 시끄러운 아영이란 아이가 맨 앞에 앉겠다고 지원을 했다. 그랬더니 그중 '김다ㅇ'라는 이름이 매우 독특했던 아이가 내게 말했다. "난 공부 열심히 할 거라서 아영이 옆에는 절대 못 앉으니 혹시 아영이가 내 짝으로 나오면 나랑 자리 바꿔줘." 라며 내게 바꿔줄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닌 명령을 했다. 나도 그 친구가 너무 시끄러워서 싫었기에 " 미안하지만 못 바꿔줄 것 같아. 너는 그럼 내가 아영이랑 짝이 되면 나랑 바꿔줄 수 있어?"라고 묻자 돌아온 답은 "미쳤냐."였다. 감히 네가 내 요구를 거절했다며 씩씩 거리며 절친과 쑥덕대며 자리 뽑기를 해보니 결국 아영이와 그 아이는 짝이 되었고 갑자기 엎드려서 울기시작했다. 아이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이들과 단짝에게 여기서 얘기할 수 없다며 나가서 얘기하자며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나고 와서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을 느꼈고, 내가 딱히 잘못한 것이 없었기에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아이들이 내 근처에 와서 계속 수군대며 신경에 거슬리게 하는 왕따 시키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경험해 봤으니 두 번째는 괜찮겠지? 라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상처는 어릴 때도 받지만 나이가 80이 된다 해도 받는다. 그 아이들이 나에 대해 수군대며 괴롭히던 왕따를 그만둔 건 어이없게도 내 윤리과목 성적을 알게 된 이후였다. (성적이 높은 아이들에게 우등상을 줬었는데, 우등상을 받는 날 담임의 결근으로 부담임 선생님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 숨기듯이 준 상장 덕분에 아이들이 내가 공부를 조금 한다는 것을 알릴 수 없었고)  끈질긴 공부 방해에도 참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와 달리 수학과 영어 시간은 점수별로 우열반이 나눠졌고, 야자 시간도 전교 50등까지는 우등반이 따로 있었기에 나는 그 반에 속해서 수업을 들었기에 하루 5교시 정도(?)만 참으면 되었다.(당시 한 반의 학생은 55명 정도였고, 총 16반이 있었다. 이과와 문과가 나뉘었지만 교차지원이 가능했기에 등수는 문과 이과 관계없이 성적별로 매겼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윤리과목 성적표가 반 한 바퀴를 돌더니 놀라움에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의 고등학교는 과목별로 성적과 전교 등수, 반 등수가 쓰여있는 종이를 돌려서 자기 학번 옆에 점수가 맞는지 확인하고 사인하여 제출했기에 누가 몇 점을 받았으며 몇 등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학생의 인권 따윈 없었고, 선생님들의 성적에 대한 차별은 대단했다. 체벌받을 일이 있어도 성적이 높으면 제외되곤 했었다. 전 과목 점수가 돌았고, 따돌리던 주동자의 절친인 아이가 갑자기 교탁에 올라가 말하는 것이다. " 이번에 윤리랑 물리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서 평균이 40이고 각 선생님들이 경위서 쓴다더라. 물리랑 윤리 전교 1등이 누군지나 보자. 우리 반엔 없겠지만."이라고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 미쳤다. 우리 반에 윤리전교 1등이 있네. 반 2등 하고 점수 차이가 30점이나 난다. 하나 틀렸다... 만점 없다더니 진짜네... 그런데 그게 쟤야." 이러면서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서 점수표를 돌려 보면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윤리는 수능에는 들어갔지만 주요 과목이 아니었기에 난 물리과목의 처참한 점수를 보고 울고 있었다. '내 내신점수 어떻게 할 거냐고. 물리 미친 거 아니냐고. 전교 등수만 높으면 뭐 하냐고. 수우미양가로 평가하면 난 진짜 이 과목 때문에 대학 못 간다고, 선생님이 내 인생을 망쳤다.' 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아이들은 내 주변에서 수군대며 괴롭히지 않았다. 치사하게 공부 좀 한다는 게 알려지니 괴롭히지 않았다. 따돌리던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던 것은 영어 수학반이나 야자시간 우등반에 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잡았다고 치졸하고 끈덕지게 거짓을 더하여 괴롭히는 이런 것이 여자들의 심리이다. 차라리 생산적인 일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화장실을 갈 때도 꼭 같이 가줘야 한다. 같이 가주지 않으면 삐쳐서 험담과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막상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지들은 졸려서 잔다고 모른척하는 것이 속된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오히려 제대로 된 속내도 모른 채 속된 여자들의 편에 선다. 그러기에 남자들은 '여우 같은 여자들이 곰 같은 여자보단 낫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난 개인적으로 오히려 곰 같은 여자들이 좋다. 


 따돌림과 괴롭힘, 학교 폭력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당할 수 있는 게 왕따다. 그랬기에 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절친이던 친구가 고3 때 갑자기 따돌림을 당해 울며 달려와서 안기기 시작하면서, 점심과 저녁때 내가 그 밥에 가서 같이 밥을 먹거나, 그 반에 내가 알던 아이들이 있으면 이 친구를 부탁하였다. 앙앙 울면서 청소시간마다 복도를 달려오며 안기던 미연이를 보던 담임선생님이 우리를 보며 진지하게 외쳤다. " 떨어져라 가시나들아!! 미쳤나!!! 누가 보면 이상가족 상봉하는 줄 알겠네. 니들이 견우와 직녀가? 갑자기 고3이 되면 미친다더니 이것들이 돌았구나 돌았어. 선생님들 여기 보소 가스나 둘이서 신파 찍는다." 다른 반 선생님에게까지 소리 지르며 놀리시던 선생님 덕에 웃으며 유쾌하게 안아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 성격상 그녀의 감정에 이입되어 슬픔과 우울에서 같이 허덕였을 테니. 참고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왕따의 주범이었던 공주병 '김다ㅇ'는 고3 때 바로 옆반인 12반이 되었고, 우리 반에 와서도 자꾸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나를 따돌리게 만들려 했다. 참으로 끈질긴 그 성격으로 차라리 공부나 하지 성적이 나빠 이 성적으로는 전문대학조차 가지 못한다고 고3 2학기때가 돼서야 예체능으로 바꿨다며 설쳐대더니 아이들이 아무리 떠들고 장난을 쳐도 단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웃으시던 온화하시고 점잖으셨던 수 2 선생님시간에 일이 터졌단다. '김다ㅇ'는 선생님을 무시하면서 대놓고 떠들며 얼굴만 한 거울을 꺼내어 빗질을 하니 보다 못한 선생님이 빗과 거울을 집어넣고 공부하자고 하자 선생님께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단다. "난 예체능이라 수 2 수업이 필요하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다. 우리 엄마아빠도 나에게 소리 지르며 야단치지 않는데 선생님이 내게 야단치는 것이냐."라고 말이다. 참던 선생님이 극대노 하셔서 앞으로  반에서는 수업을 하고 싶지 않다시며 나가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 아이는 모든 선생님들 입에 오르내렸고, 아침 7시 등교하여 오후 수업이 끝나는 6시까지 어떤 수업도 듣지 못하고 9월부터 수능이 끝날 때까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던 것을 보았다. 이때는 '정말 신이 있나 보다. 인과응보다. 아 속 시원해.' 라며 그 아이를 지나치며 맘껏 미소 지으며 지나갔다. 물론 소문을 듣고 구경온 다른 반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 저것들은 인성이 쓰레기라고. 나이 처먹고도 저러냐." 며 욕을 해댔다. 상세한 이야기도 반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께서 얘기해 주셔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얼굴 찌푸린 적 없던 퇴임을 앞둔 선생님이 얼굴이 벌게져서 교무실에 들어오셔서 "12반 수업은 다시는 못하겠다. " 하셔서 모든 선생님들이 놀라셨다고 한다. "그 얌전한 양반을 내가 30년이 넘게 봤는데, 어떤 미친년들이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한 거냐."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앞문과 뒷문을 열라고 하시더니 학교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치셨던 윤리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혹시나 내 글을 읽으면서 '나는 현재 그런 일을 당하고 있어서 지금 너무 힘들어서 살고 싶지 않다. 너는 그 일이 지나갔으니 살고 있는 거지 네가 지금 나라면 너도 죽고 싶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 역시도 당시엔 어떤 위로를 받아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내 삶이 평탄한가? 아니다 지금도 지옥 속을 걷고 있고,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도 가끔은 한 번씩 행복한 일이 생긴다. 그 한 번의 행복으로 살아내고, 남은 가족들을 생각해서 참고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너무 힘들면 가족이고 뭐고 고통 없이 그냥 날 데려가줬으면 좋겠고 , 내 장기를 기부해 줬으면 좋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한다. 어차피 타서 재가 될 몸인데 내 시신이 너덜너덜 해지더라도 죽어서라도 좋은 일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내가 살아내고자 해서 내 의지로 살아내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게 만드시는 분이 내겐 계시기에 그분께 울부짖으며 원망하면서도 살고 있다. 그런다고 내 상황이 당장 바뀌지도 않는다.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가 당장 올 것이라는 믿음은 없다. 그저 나도 모르게 하루하루를 먹고 자면서 오늘이 며칠인지도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통과해 나가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살고 있다. 잘살고 있지 않지만 살아있다. 지금 나와 같은 아픔으로 힘들어하거나 힘든 적이 있던 사람들이 있다면 나를 반면교사 삼아 위로받기를 기도해 본다. 겨우 이것 가지고 그런다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올 나의 글들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그 이후로도 또 어떤 일들을 겪고, 아파했는지 말이다. 내 인생을 읊기 시작하니 꼭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 아니한가?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드라마가 나온 것 아닐까?  요즘 빠져있는 굿 파트너를 보고 울부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내가 겪은 감정과 상황과 마음들이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척 우울한 장르가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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