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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쁘게 Aug 26. 2024

학벌, 학력이 사람을 인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1)

내가 40년간 겪어오고 있는 소위 "좋은 집안." 사람들의 치졸한 행동들


내 외가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부터 세브란스연합의 학교 의사 출신으로 1950~60년 당시 돈을 쓸어 모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 어려운 살림이었다는 데도 카메라, 피아노, 피아노 책, 텔레비전, 부동산, 현금 등이 있었고 엄마의 몇십 명이 넘는 친가 및 외가 사촌 친척들까지 모두 데려와서 대신 학비를 대주고 길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의학적 공부보다 소위 과학적 창의 및 발명욕구가 강한 분이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생각하고 제작했던 것들이 현재에는 쉽게 만들어지고 이루어져 널리 사용화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참게가 귀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양식하는 방법을 만들겠다며 빚까지 지며 돌아가시기 전인 90년대까지 노력하셨지만, 결국 돌아가신 지 몇십 년 후에 최초로 양식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버는 돈이 너무 많아 항아리에 가득했다던 할아버지의 몰락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너무나 선한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증서 달라, 빌려 달라는 말에 순순히 다 들어주어 수많은 사기와 빚으로 자기 자식들이 중, 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머무를 집조차 없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했다고 한다. 내게 있어서 외가는 많이 배우고 따뜻하고 조용히 나를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인해 항상 따뜻한 곳이었다. 게다가 성공한 자식들 덕에 내가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생신 때 조선호텔을 빌려서 잔치를 한다던가 하여 축하연을 하고, 적어도 5~10년마다 호텔에서의 축하연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내게 있어 외가는 많이 배운 고학력의 엘리트 집단의 잘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님에도 철부지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내가 그들인 줄 착각하고 그 화려함을 좋아했던 것 같았다. 외가의 이모 삼촌들이 여럿이었기에 그에 사촌들만 스무 명가량이었다. 명절 때 모두가 모이면  60평대였던 외할머니 집이 좁아서 마루에서까지 다닥다닥 붙어 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 부모님만이 의사나 약사, sky대학 출신이 아닌 평범한 회사원과 교사 셨기 때문에 나는 그들만의 리그에 끼지 못한 다는 것을 몰랐었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중공업에 재직하셨었기에 지방에서 초, 중, 고를 나올 수밖에 없던 내가 인 서울로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1월 신정에 모였다. 외사촌들이 나이가 겹치는 동갑들이 내 나이대부터 있었기에 학벌의 비교가 시작될 줄은 이때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비명문대 대학생이니 그들에겐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 버러지 보다 못한 존재였고, 그를 여실히 표현한 것이 두 번째 글에서 쓰던 악랄하고도 저열한 그 이모내외였다. 당시 동갑이었던 사촌이 그의 부모처럼 의대에 입학하니 나, 사촌언니와 오빠는 무시한 채 그 아이에게 물었다. " 네가 대학생이 되었으니 동생들에게 어떻게 공부를 했으며, 이렇게 공부하라 조언을 해줘라."라고 말이다. 옆에 초라하게 앉아있던 사촌 언니와 오빠가 내게 말했다. '우린 대학생 아닌가? 사람을 옆에 앉혀두고 인사도 안 받고 개보다 못한 취급을 하네.' 라 말이다. 그 이모 내외는 70년대 후반의 sky대학출신과 인서울 출신의 부모였고 (지금도 자신의 학벌을 내세워 자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악랄하게 남의 돈을 사기 쳐서 떼어먹고서 갚지도 않고, 자신 형제의 생명보험금을 자신들이 타서 쓰는 등 빚까지 지며 살면서 끝까지 갚지 않고, 명품을 쓰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자신의 친정엄마가 모아둔 돈까지 모두 빼서 쓰고, 자신의 엄마의 귀금속도 훔쳐가 버젓이 사용하는 등의 행태를 보인다. 그들의 자식들은 형제자매와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의사가 되기도 하고 외국에 유학까지 다녀와 현재 TV에도 나올 정도로 잘 되었지만, 할머니께 용돈 한번 드리지 않던 아이들이다. 그들이 대학생 때 알바를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사보지 못한 50~100만 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명품 화장품에 명품백, 명품신발만 신고 다녔다.  

그 이모는 내가 마흔이 가깝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있자 내 엄마가 없는 사이 자신의 형제들만 있는 사이에서 악의적으로 내게 말했다. "내 애가 일하는 병원 원장 의사가 이혼했는데 아무래도 이혼당한 것 같데. 너무 더러워서, 그래도 돈은 많다네. 현금으로만 10억이 있다더라. 너 소개받아 볼래~" 라며 비웃는 것이다. 정말 소개할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나를 깔아뭉개기 위한 악의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같이 듣던 이모 삼촌들은 자신의 자식이 당한 일이 아니니 모두 못 들은 척 입들을 꾹 다물고 있었고, 나는 " 당신이나 당신 딸은 돈 많은 남자라면 눈이 뒤집히니 당신 딸이나 소개해주세요. 전 괜찮습니다." 란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런 말로 당차게 답해주지 못했는지,  그것이 아직도 천추의 한이다.  그때의 난 그저 억지웃음을 지으며 "괜찮아요. 누가 소개해준다 해도 아직 누굴 만날 여유가 없어요."라고 주절거리던 내 입이 죽도록 미울 뿐이다.


그녀의 대단함은 지금부터다. 내 아버지가 국가 공기업에 일하고, 엄마도 교사셨고, 서울에 있을 때 여기저기 신혼집을 떠돌다 보니 안 되겠단 생각에 아버지가 퇴근하고 여러 곳을 돌다가 지쳐 강남 쪽 아주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집도 보지 않고 바로 계약했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에 그렇게 크게 오를 줄 알았다면 큰집으로 살 것을 후회하기도 하셨다. 이모부 중 한 분이 공인중개사를 하고 계셨고, 자신이 사는 동 옆에 아파트를 사라며 권하여 가보지도 않고 경기도에 아파트를 사두셨다고 한다. 너무 외진 곳이어서 그랬을까? 그 당시에 사서 몇 년 전 팔 때까지 값이 그대로인 오르지 않은 유일한 아파트라고 한다. 나도 몰랐던 이런 부모님의 자산을 그 이모 덕에 알았다. 그 이모내외가 찾아와서는 대뜸 자신의 재산인양  " 강남 아파트 풀대출 담보 잡아서 저희 0억 빌려주세요. 이자는 매달 0부로 드릴 테니." 라 하자 아버지는 " 경기도 아파트는 내가 담보해 주고 다 날려도 좋으니 너희 준다고 생각하고 대출해 줄 수 있어. 하지만 그 집은 미안하게도 못해주겠다. 그런데 처제가 어떻게 우리 애들도 모르는 재산까지 다 알아? 애 엄마가 그런 걸 얘기할 사람도 아닌데."라고 말하니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며 사라졌고, 몇 번의 속된 전화와 끈질긴 권유에도 거부했다. 당시 대부업체 이율보다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거절했던 것이 천만다행이지 그때 빌려준 사람들은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자신의 집들이 저당 잡혀 다 빼앗겨 버렸고, 그들은 뻔뻔히도 아직도 갚지 않고, 갚을 생각도 없이 잘 살고 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엄마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서는 엄마의 이혼을 알고서는 외가 친척에게 모두 알려서 외할머니부터 외삼촌, 이모들의 전화와 원성을 받고 나와 동생들에게 아버지에게 몇 년까지 재결합을 약속받으라 당부 전화까지 해대었다. 그 일로 외가 사촌들까지 내 부모의 이혼을 알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억지로라도 재결합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당시 내 아버지도 불륜 로맨스에 빠져있었기에 재결합해 줄 생각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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