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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쁘게 Aug 20. 2024

딸과 엄마의 '팔자'가 같아져 버렸다.

그래도 엄마 팔자가 나보다는 좋다.



나의 엄마도 나도 너무나 믿던 내 아버지에게 위장이혼이라 속아서 약 20년 전 엄마는 이혼해 주고도 헌신하다가 헌신짝처럼 버림받는 동시 아버지의 불륜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끝까지 아버지에게 헌신했으며, 친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우리를 두고 아버지의 친구들이 다 들리게 속닥였다.

 "전처가 여기 와 있노? 전처 아니고 지금 사는 여자가?" 등.

친가 친척들 조차 엄마가 장례식에 올 이유가 없다며 괄시하였으나 친조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요양원간식과 영양식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고, 친 조부모의 건강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고기로만 동그랑땡 등을 몇십 개를 직접 만들어 구워서 아버지에게 보냈으며,  친 조부모와 친 증조부모의 제사까지 엄마의 몫이었다. 2달에 한 번씩 제사가 있어서 1년 동안 6번 제사를 지냈다. TV에서나 보던 종갓집 제사였다. 당연히 제사 음식은 사 와도 안 되고 엄마와 나, 동생들이 비싼 재료를 사다가 모두 만들어야 했다.  돈이 없다며 우리에겐 먹고 싶은 것도 사주지 않으면서도 제사 때는 값비싼 재료들을 아주 많이 사 와서 시키는 대로 만들고 새벽에 일어나 제사를 지내야 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도운 적도 없고, 당연히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치 그 집에 종속된 여종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10년간 그 여자와 살면서 그 여자에게는 시키지 않고 값비싼 사치명품들이나 사주고 만만한 엄마에게는 평생 그런 일을 시켰고, 그 흔한 반지 목걸이조차 엄마에게는 사준 적이 없었다. 결국 평생 집안일로 골병이 든 엄마는 우리의 강요로 반 강제적으로 제사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끝까지 바람피운 적 없다며 아니라고 발뻄하며 증거가 있는데도 아니라고 우기기만 하면 된다는 친구들의 말 때문인지 바람피운 적 없다 우겨 대지만 증거 이기는 우김을 봤는가? 아버지가 우기든 말든 난 내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지금까지 폭력적인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원망스러운 말들을 뺨 몇 대 맞을 각오로 아버지에게 퍼부어댔다. 물론, 내 전남편과 동일시하여 그에게 퍼붓지 못한 말들을 아버지에게 소리 지르며 원망을 퍼부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엄마의 이혼은 우리 남매들이 성인이 될 때,

1) 아버지가 평생 원했던 학벌에 대한 자격지심을 채우고 (대학원을 진학하기로 하고 부산에 있는 야간 석사박사과정 수료)

2)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그렇게 벗어나고 싶다던 가장 역할을 엄마에게 짐 지우고

3) 새로운 젊은 여자와 내로남불 상간을 하고,

4)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은데 사업이 망하면 재산을 다 날릴 수 있다며 엄마 명의로 아파트 한 채의 명의를 엄마 이름으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재산분할로 명의만 돌려준 집이라 전세금을 모두 아버지가 가져가 자신의 주식투기와 내연녀와의 유흥비로 모두 탕진해 버려 집을 팔아도 세금을 내고 나면 엄마 앞으로 남는 것은 빚뿐인 게 현실이다.

가족에게만 가짜 이혼이지 자신의 친구들과 형제들, 남들, 그리고 법적으로는 진짜 이혼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을 버리고 일타 5피를 가진 일명 미친놈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당시 유부녀였던 '천정 x'씨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여자로 엄마와 생일까지 똑같았던 엄마보다 12살이 어린 여자로 아버지가 한두 달에 한번 이틀 정도 서울집에 와있을 때는 영어로 "I miss you ~♡♡."를 밤새 보내던 여자였다. 지금은 부산의 비싼 동네에서 큰 고깃집을 한다고 한다. 그녀가 아버지와 상간을 하던 나이가 38세였다. 내가 38세까지 결혼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나는 50이 넘은 유부남이 아무리 돈이 많고 잘해주고 만나는 사람이 없어 외로울지라도 정말 싫을 것 같았다. 자기보다 15살이나 많은 늙은이를 만나고 싶었을까? 하지만 유부녀이던 그녀는

어찌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몰래 10년간이나 바람도 피우며 자기 가정도 지키고 살았는지, 차라리 젊은 자기 남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자기도 직업이 있었고 아들 고액 과외 몇 개나 시켜 선행을 초6에 모두 끝내 서울 법대를 보냈다는 돈도 잘 벌고 미군부대에서 일하여 영어를 잘한다던 여자인데. 나와 엄마는 아직도 그 상간녀를 이해할 수 없고 상간을 상상조차 못 하겠다고 얘기한다.

 18평이던 서울의 작은 집은 방이 두 개뿐이었기에 대학교 3학년 때 내가 주말에 집에 와 가장 작은 옷방에서 자는데 밤새 울리던 진동소리에 일어나 울리는 핸드폰을 찾다가 발견한 것은 아버지 옷 주머니 속의 휴대폰 메시지였다. 남자라면 이런 문자를 하트까지 찍어 보낼 리 없기에 순간 그 전화번호와 여러 가지 번호를 대강 저장해 두느라 정작 그 여자의 번호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부모의 이혼이 성인이 되고 나서 이뤄져도 너무 아프다고 말한다. 나도 이에 무척이나 동감한다. 거기에 더하여 부모의 외도까지 알게 되면 나이에 관계없이 아픔을 넘어서 고통스러움과 배신감을 처절하게 느낀다. 마흔을 넘긴 내가 아직도 아파하듯이.

 아버지의 외도를 23살에 알고서 나와 엄마는 그 배신감에 정신없이 울었지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힘이 돼주질 못했다. 간통죄가 있었지만 엄마와 아버지는 이미 법적이혼한 상태였고, 기혼이었던 그 여자 집안에라도 알릴 것을 알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 여자의 아들이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서울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었다.

 "너희 엄마가 내 아버지와 이렇게 바람을 피워서 내 엄마와 나, 내 동생들까지 모두 그 배신감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너도 너희 엄마의 외도에 배신감을 같이 느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이다. 내가 돈과 힘이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면 엄마의 이런 아픔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무력함 나를 좌절시켰고, 당시 이로 인해 사춘기조차 조용히 지나갔던 동생이 스무 살이 넘어서도 몇 년 간 원하는 대학을 간답시고 인생을 포기한 채 방황하며 삐뚤어져 엄마와 내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데도 나와 엄마는 물리힘이 약했기에 동생을 제재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나의 무력함에 더 빠져들었고, 우울함이 나와 함께하였다. 

 20년 전인 2000년대 그 당시에는 이혼이란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가족의 비밀이었으나 그러나 그 비밀을 <1>한 이모의 불순한 의도( 언젠가 뒤에 이 내용도 기재하여 링크를 걸어두겠다.)에 의해 모든 친척에게 우리 집의 치부가 까발려졌고, 나는 이 집안의 첫째라서 그런 것인지 외향이 아버지와 많이 닮아서 인지 외가의 큰 외삼촌은 내게 엄마의 복수라도 하듯이 나를 모든 이모, 삼촌과 사촌들 앞에서 깔아뭉갰다. 나는 그 삼촌의 자식과 동갑이지만 학벌도, 직업도 그의 자식보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 스스로도 자존감이 낮았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데도 <2>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몇 십 년간 지속적으로 나를 만날 때마다 나만 짓밟았다.(어떻게 짓밟혀 왔는지도 후에 기재하여 링크를 걸겠다)

 

요즘 장나라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 "굿 파트너."의 대사에서 나오는 말이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건 와이프가 무조건 알게 돼 있어. 모든 감각으로 알아." 난 이 대사를 듣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역시 신들린 무당처럼 시시 각각 전 남편의 바람을 느꼈는데 내가 그를 그때도 미치게 사랑했고 그와 끝까지 살고 싶었기에 "내가 예민해서 그런 것."이라 세뇌시키며 대뇌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혼자 난임산부인과를 다니며 시험관을 하며 "아이가 생기면 나도 그도 바뀌겠지."라는 생각으로 아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모든 결과는 처참했다.

 유난히 두근거리고 잠도 안 오고 미칠 것 같은 나쁜 기분이 들던 날에 일기를 쓰고 엄마에게 톡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했었는데, 정확히 그날들에  대형 H기업의 필리핀파견 계약직으로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Ktv, JTV 등의 유흥업소와  레지던스를 들락거리고, 회사 내 필리핀 여직원과 외도하며,  결혼 전 한국에서는 나 몰래 일명 '성매매녀.'와 만나고 연락하며, 결혼 후엔 한국에 휴가를 나와서 본사에 일을 간다며 상사와 만나 술을 마시고 모텔에서 6시간씩 머무른 날이었다. 그녀들이 성매매녀인지, 페북이나 헌팅으로 만난 섹스 파트너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단, 필리핀의 회사 직원들은 그가 유부남인 것을 모두 안다. 그가 나를 회사에 데려가 그들에게 인사시켰고, 한국 직원들과는 인사를 하고 여러 번 만나 식사를 하고 집에 초대해 식사대접까지 했기 때문이다. 근처의 한국식당 사장님들과도 인사를 했기에 그가 기혼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를 만난다는 것은 필리핀 상간녀도 자신이 간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알아도 상관없고, 그가 자신을 선택하든 말든 현재 그와 그의 돈이 제 것이니 괜찮다는 것이다. 필리핀 여자들은 남자들의 나이와 관계없이 외국인이 최고의 남편감이며 그다음이 필리핀 남자라 한다. 외국인들은 필리핀 사람보단 돈을 많이 벌고 돈이 많으니 말이다.


 그들은 사랑이나 정조보단 돈과 성관계가 일상이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 일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남자가 아니면 다른 남자 만나면 된다라는 관념들이 강하여 남자들이 아이와 자신을 버려도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서 살아간다. 필리핀은 간통죄가 아직도 현존하는 나라라는데 그 두 연놈을 간통죄로 신고하여 그 회사에 필리핀 경찰이 가서 간통신고 들어왔다며 그들을 잡아감으로 회사사람들이 다 알게 되고 한국본사까지 떠들썩 해지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필리핀 뉴스에도 나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두 연놈이 어느 나라에서건 얼굴 들고 살 수 없고,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당하고 비웃음 당하며 살아가길 꿈꿔본다.


 난 아직도 굿 파트너를 보며 심히 격하게 공감하며 상간녀인 비서에게 쌍욕을 날리며 내 감정을 이입하여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인 양 눈에 레이저를 쏘아대며 열정적으로 보고 있다. 상간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미친년!!!."하고 소리 지르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엄마랑 통화했던 날 엄마는 '네가 지금 시험관 때문에 호르몬으로 예민해서 그렇게 두근거리는 거야.'라고 말했던 날에 그 개새끼가 발정 난 개처럼 정말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녔어. 그걸 확인하고서 내가 신들린 줄 알았을 정도야. 그런데 엄마는 내가 23살 때 아버지 외도로 뭔가를 느꼈다는 말 없었는데, 엄마도 느꼈어? 난 엄마는 못 느끼고 그 돌팔이 성폭행범 가짜 한의사 부인인 무당아줌마가 엄마에게 아버지의 외도를 알리려 전화하여 말해서 아버지의 외도와 상간녀를 안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얘기했다.

 " 엄마도 다 알았어, 다 느끼고 있었고, 그 무당아줌마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고, 나도 느끼고 있었어."

아직 내가 헤어짐을 결심한 것이 6개월 전쯤이고 그때부터 공황장애와 우울증, 불면증으로 약을 먹고 있고, 대략 한 달 전쯤에 그와 헤어졌다. 그동안 울고 웃으며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은 아냐. 난 아버지가 바람났을 때도 그 아들에게 찾아가서 알리고 싶었고, 아버지가 마루에서 자고 있는데 순간 식칼로 아버지를 찌르고 싶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생각뿐인 겁쟁이라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런데 엄마랑 내 팔자가 왜 이리 똑같냐. 그 못된 이모가 자기 팔자와 외할머니 팔자가 똑같다며 딸이 엄마팔자 닮는다더니 자기가 외할머니 때문에 이런 팔자라고 자기가 만든 상황을 할머니 탓을 했다는데, 나는 엄마 탓을 하는 건 아니고 어찌 엄마랑 나랑 똑같이 남자가 못생겼는데도 자신감 많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 배신을 당했을까? 차라리 아버진 50대에 우리가 다 크고 나서 바람이 났는데, 난 40 넘어서 늦게 한 결혼인데 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해 결혼 전부터 지저분하게 놀더니, 결혼 후엔 본격적으로 성매매에 바람까지 피우니, 차라리 엄마 인생이 내 인생보다는 좀 낫네. 그래도 아버진 엄마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엄마에겐 엄마편인 우리가 있으니. 지금은 엄마가 나 때문에 더 아프고 힘들어서  내가 엄마 자식으로 태어난 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보단 엄마 팔자가 훨씬 좋다 그렇지?"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래 맞아. 난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너희와 전 남편에게 내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사랑했으며, 너희로 인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너희가 내가 살아가는 힘이고 기쁨이야. 그러니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 말아. 엄마는 네가 없으면 엄마도 못살아."라고 코가 빨개져서 눈물을 참으며 말하신다.

나는 신께 물었다. 엄마는 무엇을 그렇게 잘못 살아서 이런 인생을 60년 동안 살았어야 하느냐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인생은 온통 희생뿐이었다. 점을 보면 안 되지만 십몇 년 간 배우자 기도에도 하나님이 내 배우자를 주시지 않자 하나님을 탓하며, 엄마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엄마의 사주엔 " 부모, 형제, 자식, 남편, 친구 복이 없어 너무 불쌍하여 하늘이 돕는 운명이다."라 쓰여있는 것을 보며,  "소름 돋네."라고 말하자 엄마가 말했다. " 아니야, 그래도 난 자식복은 있어. 자식이 아무리 속 썩여도, 너희가 내 삶의 전부이자 희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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