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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유니 Oct 18. 2020

정의되고 싶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

화풍으로 정의되는 것은 독일까 득일까.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은 날에 누가 말했다.

너 옷 입는 스타일이 또 바뀌었구나!


아니야, 나는 원래 한 가지 스타일에 맞추어 옷을 입지 않았어.

그냥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입는데 말이지.

나도 모르는 새 그의 안에서 내가 정의되어 있었나 보다.

바뀌었다는 그 말이 새삼 묘하게 다가왔었다.


지금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요즘은 그림과 화풍의 정의됨에 대해서 고민힌다.

뚜렷한 화풍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서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싶기도 하고,

그 어떤 화풍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고 싶기도 하다.

두 마음이 딱 반반이다.


뚜렷한 나만의 화풍으로 정의된다는 건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나’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줄 거다.

나를 (먹고사니즘적 관점에서) 든든히 지켜 주겠지.

그러나 또한 그게 날 속박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웃기게도 화풍의 정의됨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면서,

인생 자체를 통틀었을 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한 가지 테마로 정의되기는 또 원치 않는다.

진짜 되고 싶은 건 넓은 의미로 만드는 사람이다.

창작을 하건, 브랜딩을 하건, 내 바를 열건 아니면

사랑하는 친구의 생일을 최고로 즐거운 날로 만들어 주건.


만든다는 말에는 범위도 없고,

만듦이 수익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는 제약도 없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태생이 원잡러는 아닌가 보다. 


어제는 친구랑 전화 통화를 하며, 십여 년 후에 열 내 바의 이름과 테마를 미리 정했다.


-처음엔 퍼시픽이랑 아틀란틱, 카리브 그런 걸 생각했어. 내가 바다를 좋아하잖아.

근데 퍼시픽은 좀 흔한 것 같기도 하고, 고민 중이야.


-차라리 퍼시픽이 낫다. 아틀란틱은 별로야. 너무 미국 옛날 술집 같애.


-그건 어때, 퍼시픽 앞뒤로 의미 없는 단어들을 갖다 붙이는 거지, 사우스 퍼시픽 클럽 이런 식으로.


-아냐. 뭔가 별로야. 사우스가 별로야.


-그래도 노스는 안돼, 노스페이스가 생각난단 말이야. 이스트는 빵이 생각나서 안 돼.


-다른 건 없어?


-울루루(Uluru)를 생각해 봤는데 어때? 호주에 그 큰 바위산. 바 이름을 울루루로 하고 

빨간 테마로 브랜딩해도 예쁠 것 같아.


-너 이름 Uluru로 지었는데 사람들이 우룰루, 울루루, 우루루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리뷰 쓰면 어떡해?

요즘 리뷰가 얼마나 중요한데. 너 그러면 검색에 안 잡혀. 너 그거 기본이야


-아 맞네! (이때 정말 호탕하게 웃었다)


-어쨌건 너는 바 이름을 자연물에서 따오고 싶은 거지?


-응, 그건 무조건이야.


-야 그러면 내가 좋은 단어 하나 만든 거 있는데 어때? MLRD. 엠 엘 알 디 인데 발음이 꼭 에메랄드 같지 않아?


-오 예쁘다, 예쁘다… 근데 누가 리뷰에다가 바 마르드에 다녀오다, 이런 식으로 쓰면 어떡해.


-아 맞네! 아 웃겨. 아니면 아예 바 이름을 오션으로 해. 오션도 예쁜데.


-그거 나쁘지 않지… 근데 이름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인테리어를 아예 바다 테마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단 말이야?


-야 그럼 눈을 돌려. 영어 말고 스페인어로 가는 거야. 엘 파시피코. (el Pacífico) 앞에 엘이 붙어야 해.


-야. 좋다. 엘 파시피코, 엘 파시피코. 일단 가칭은 엘 파시피코로 가고,

십 년이나 시간이 있는데 그사이에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겠어…



엘 파시피코, 태평양.

나는 바다가 너무 좋아 해양학과에 진학했었지만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고,

바다의 이름을 딴 바를 여는 미래를 상상한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게 역시 좋다.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덕에 생기지도 않은 바 이름을 지으면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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