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그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얼마 전, 9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를 시청했다.
'낙동강 페놀유출 사고'를 모티브로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고졸 여사원들이
회사에서 받는 부당한 처우도 함께 그리고 있다.
정의사회가 구현된다는 결말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났고 나는 내용보다는
그 영화 속 시대 배경, 상품의 로고 등이
더 깊게 남았다.
나는 90년 생이다.
80년대는 내가 살아본 적이 없으니
추억이나 향수를 느낄 게 없다.
사실 90년대도 마찬가지다.
90년대엔 내가 어린 나이였기에
영화 속 인물들처럼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사이다 로고,
지하철 역명의 글씨체,
신문과 버스 디자인 등은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어린이였던 나도 그 당시의 물품들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데 피 끓는 10대와 20대를 보냈던
그때의 청춘들은 얼마나 그때를 그리워할까.
초등학교 저학년 생이 기억하던
90년대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토요일 출근/등교다.
나는 초, 중학교시절 토요일에 등교하는 게 당연했다.
2000년대 초반 까지는 어른들도 회사에 나갔다.
토요일 오후 2시 야구경기를 보러 가면
넥타이 한 아저씨들이 많았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것이고
학생들한테 등교하라고 하면
아마 등교거부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기에는 여러모로
지금 기준과는 한참 동떨어진 일들도 많이 일어났었다.
학교 간의 패싸움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단순히 주먹으로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한적한 공터에 모여서 말 그대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뒤엉켜 싸운 뉴스였다.
더 흥미로운 건 그 일로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이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채로 뉴스에 계속 나왔다는 점.
이 사건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자의
얼굴이나 실명이 언론에 그대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이 점은 좋은 점일 수도 있고 나쁜 점일 수도 있겠다.
또 하나는 바로 흡연.
90년대 후반,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이 정말 많았고
그게 당시 기준으로 이상한 게 아니었다.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영화 속에서도 직장인들이
흡연실이 아닌 사무실에서 계속 담배를 피워대고
여직원들은 마땅히 그게 본인의 일인 것처럼
재떨이를 비웠다.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 90년대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 속 남자들 중 일부는
여직원들에게 성차별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는데,
내가 어렸을 적 봤던
택시 승차거부 사례를 소개한 뉴스가 떠올랐다.
한 여성이 아침 일찍 택시를 잡자
택시기사가
"첫 손님으로 여자 태우면 재수 없는 거 몰라?"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러면 차를 세우질 말던가
세워서 기껏 그따위 소리나 하고 가는
그 남자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
요즘이었으면 택시기사의
신상이 탈탈 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30년 사이에 우리나라는
무척이나 의식 수준이 고양 됐다.
이 점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90년대가 마냥
야만의 시절이었던 건 아니다.
저 당시 나는 물론이고 내 친구들도 그랬지만
놀다가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고,
내가 가진 열쇠도 없으면
그냥 옆집이나 친구네 집 가서 있는 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친구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초인종 누르고
"저 OO인데요, 집에 아무도 안 계셔서 올 때까지 좀 있을게요"
하면 친구 어머니도, 옆집 아주머니도
"응, 그래라"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이 또한 지금 아이들에게 말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웃집 사람들을 속속들이
다 안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웃집 가족구성이 어떻게 되며,
어떤 연령대인지는 알았고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왕래는 있던 시기였다.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 가면
아는 친구 한 명 이상은 꼭 있었고
친구네 집에서 밥 먹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구 형, 누나, 동생과 노는 것도 당연했고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놀거나 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점잖게 혼내기도 했다.
지금?
일단 놀이터나 운동장에 친구가 없고
학원에 가야만 있으며 집에 아무도 없으니
좀 있어도 되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 집도 사람이 없으니까.
동네 어른이 아이를 혼내면
아이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왜 애를 기죽이냐고 엄마들은 불쾌해할 것이다.
문명이 발전했지만 삭막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바라보면
디자인도 촌스럽고, 패션도 이상하고
사람들은 왠지 미성숙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분명 아름다움은 있었고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고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낭만이라면 낭만이고
야만이라면 야만일 수도 있는
그 시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