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가 아닌 을지로를 떠올려본다
얼마 전 친구들과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갔었다.
힙지로라고 불리며 SNS에서 핫플이 된 이곳은
이른 저녁시간임에도 젊은 남녀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10여 년 전, 내가 20대 중반이던 시절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노는 곳은 홍대와 강남역 일대였는데
요즘은 활동범위가 굉장히 커진 느낌이다.
맥주 한잔 하면서 주변을 쓱 둘러보니
우리 일행이 그중 나이가 좀 많은 편에 속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참 격세지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레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내 첫 아르바이트는 모 호텔 연회장 서빙이었다.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도 좋았고,
지배인들이 알려주는 테이블 매너나
형, 누나라고 부르던 젊은 호텔리어들을 보고 배운
'사람 대하는 태도'는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가끔씩
지배인들이 사주는 술 한잔의 맛도 소소한 재미였다.
호텔이 을지로에 위치해있다 보니
회식은 늘 을지로에서 이뤄졌다.
을지로는 소주, 막걸리, 맥주, 양주 등
모든 주종이 다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직장인들이 회식하기에 무난한
고깃집과 횟집부터, 2차로 적당한 호프집,
그리고 고급 Bar도 있었는데
퇴근 시간이 다른 직장인들보다 늦는 편인
호텔 종사자들은 대부분 호프집으로 직행한다.
맥주 한잔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두 잔 정도 들어가면 지배인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의 과거 썰을 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른바 '라떼는' 식의 꼰대스타일이 아니라
정말 재밌는 에피소드를 엄선해 얘기해 줬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그때 우리 테이블 주변을 훑어보면
나를 포함한 호텔 아르바이트생들이 제일 어린 축에 속했고
지배인들 또래의 4,50대 아저씨들이 참 많았다.
'5cm 정도 풀어진 저 넥타이는 아침엔 분명
끝까지 단정하게 메어졌을 텐데, 퇴근하고 나니
긴장도 풀리고 넥타이도 풀어지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직장인들의 애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들을 다니는
그들이 '진짜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다'라고 느껴
참 멋있어 보였다.
그때의 을지로는 수많은 아저씨들의 해방구였다.
다시 지금의 힙지로로 돌아와 보자.
그 아저씨들의 자녀세대가 주인공이 돼버린 을지로.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그 아저씨들은
지금 어디서 술 한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활동 반경이 커진 젊은 세대들이 안 가는 곳이 없는
이곳 서울에서 중년층들은 갈 곳이 어디일까.
나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을 쫓아냈다는 의미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든 생각과 경험을 말하려는 것이다.
당장에 나도, 내 친구들도 어딘가에 갔을 때
우리보다 훨씬 젊은 남녀들이 모여있으면
자연스럽게 '다른데 가자'라고 말하게 된다.
아마 그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다.
한때는 회사에서 잘 나가고
집에서도 가장역할 하면서 대접도 받고 했을 텐데
나이가 들어가니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달래러
마음 편히 술 한잔 마시려고 간 가게에서 마저
눈치 보이는 게 싫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참 씁쓸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을지로는 여전히 화려한 불빛을
내고 있고, 사람들은 뜨거운 기운을 내뿜는다.
10여 년 전, 이곳에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내뿜고
자식자랑, 아내자랑에 미소 짓고
서로 계산하겠다며 상대의 팔을 붙잡던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