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고 있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
요즘엔 현금을 쓸 일이 별로 없다.
가끔씩 꿈자리가 좋은 날,
복권을 구입하러 갈 때 외에는 현금을 거의 쓰지 않는다.
골목시장에서도, 길거리 노점에서도
카드가 통용되는 좋은 세상이다.
예전에는 다들 현금을 지니고 다녔기에
지갑 자체가 필수였고
지갑의 두께가 곧 그 사람의 힘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그마한 카드 한 장만 있으면
불편함 없이 소비를 할 수 있으며
지갑의 크기 또한 그 흐름에 맞춰 변화되어 이제는
카드 지갑만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다.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지만
나는 비싼 지갑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고가의 명품 지갑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연유는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대에 있을 때 함께 생활했던 선임 A.
흡연자였던 그 사람은 항상 후임들에게
"담배 하나만" 이란말을 달고 살았다.
내가 군생활하던 때는 담배 보급도 없었기에
다 각자 돈 내고 사서 피웠다.
그리고 지금 병사들 월급의 10%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복무하던 때라서 병장이건 이등병이건
돈 궁하고, 담배 한 개비 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아이스크림은
항상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비싼 것만 사 먹었다.
그때는 뭐 그럴만한 사연이 있나 보다 싶었다.
전역 후, 서울에 사는 사람들끼리 한번 만나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A도 자리에 함께했다.
말 그대로 계급장 떼고 만난 그 자리는 참 즐거웠다.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 나누던 그때,
또 다른 내 선임, B가 지갑 자랑을 시작했다.
사고 싶은 지갑이 있어서 돈 열심히 모아서 샀다고
이야기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좋아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그 선임이
"맞아. 남자는 지갑이 좋아야지. 내 지갑도 비싼 거야"
라면서 본인 지갑자랑을 늘여놨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거 돈 100은 줬을 텐데"라고 말했을 때 적잖게 놀랐다.
20대 중반에 100만 원짜리 지갑을 쓴다는 건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었기에..
한편으로는 저렇게 사고 싶은 거 팍팍 사는 게 부럽기도 했다.
자리가 끝나고 2차로 맥주 한잔 더 하려고 이동하는데
그 선임은 집에 가야 한다며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났다.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총무 역할을 한 친구가 그 선임에게서 온 카톡을 보여줬는데
내용인즉슨,
'나 핸드폰 요금도 겨우 내면서 살고 있다.
한 번만 봐줘라. 다음에 모일 때 내가 두배로 낼게'
우리 모두 그를 한번 봐줬다.
그다음부터는 부르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얼굴 한번 봐준 셈 치기로 한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인사계 선임은
그의 집안 환경이 무척 어려운 건 사실이라고 말해줬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군대는 집안환경 상세히 써서 제출했어야 했습니다)
그럼 대체 그 사람은 왜 100만 원짜리 지갑을 산 것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꽂히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사람도 그 지갑에 꽂혔기에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려고 했으나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와 헤어진 시각은 밤 9시 즈음,
대중교통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대였음에도 그는 택시를 탔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좀 이해해 주자'라는 말이
나올 수 없게 하는 그의 행태, 아니 추태다.
좋아하는 것에 꽂혀 큰 지출도 감수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 경우는
지갑 이야기를 맨 처음 꺼낸 B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B에게 있어 그 지갑은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고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다른 것들도
지불하면서 차곡차곡 모아 구매한 결과물이다.
남들에게 피해 안 주고, 본인에게 지장 없이 살면서
좋아하는 물건 산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A는 이해할 수 없다.
모임 회비 2만 원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그 비싼 지갑을 샀다는 건 내 상식 밖이었다.
집안 환경이 어려우면 그것을 타파하는데 매진해야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 원짜리 지갑에 99만 원 넣고 다니는 게 현명한 거 아닌가?
원래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긴 했으나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는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외적인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좋은 무기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이 부실하다면 아무리 외형이 화려해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멋있고 이쁜 얼굴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면 얼마나 볼품없는가
유행은 돌고 돈다고, 언제 가는 다시 예전에 쓰던
지갑, 장지갑이 유행을 탈것이다.
그때도 나는 절대 비싼 지갑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 통장에 잔고를 더 올릴 것이며
카드 한 장 넣을 수 있는 카드지갑이면 족하다.
무언가를 산다면 고가의 물건보다는
여행이나 미식 같은 경험을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