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배우는 중입니다

입은 하나, 귀는 두 개인 이유를 알아가고 있다

by 레지널드

나는 외향적이다. MBTI로 설명하자면 E라고 할 수 있다.

과묵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모임에 나가거나

사람들끼리 모여있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대화를 이끄는 편이다.


기본적인 날씨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떤 연유로 오셨느냐 , 그리고 좀 편해지면

집은 어디 사시냐 등등. 물론 남에게 물어보기 전에

내 정보부터 이야기한다. 나는 오픈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정보부터 요구하는 건 무례라는 생각에서다.


몇 년 전 어느 식사자리였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처음 보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아서 내가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시작된 그의 근황썰은

밥을 먹는 내내 이어졌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근황을 말하는 게

이상하단 생각을 했지만 그냥 넘겼다.

그리고 술자리로 이어졌을 땐

그의 과거사, 아내와의 연애시절 이야기,

앞으로의 포부까지 들어야 했다.


나보다 다섯 살 위면 아직 마흔 살도 안 됐을 텐데,

이야기만 들어보면

세상에서 그 사람보다 산전수전을 더 겪은 사람도 없었다.

그의 러브스토리는 웬만한 드라마 설정은 저리 가라였으며

포부만 들어보면 스티브 잡스를 아득히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세 시간에 걸친 그의 토크쇼를 듣고 나는 피곤해졌다.

그가 겪었던 다사다난하고도 사실여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인생사, 포부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내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 피곤한 사람'이 전부였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함으로써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렇게 낙인찍혔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타산지석'

그 사람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수련하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절반만 하는 걸

다짐하고 실행에 옮겼다.


요즘 세상엔

말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내가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남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 들어주고 일단 진심을 다해 공감부터 해줬다.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겐 "정말 힘들었겠네",

자랑하는 사람에겐 "진짜 잘됐다. 고생했어"


고민 사연도 빠질 수 없다.

예전 같았으면 듣고 나서 내 견해를 이야기했을 텐데,

요즘은 "그래서 너는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야?"라는 식으로

상대의 견해를 묻는다.

그럼 상대는 또 본인의 생각과 계획을 쫙 말한다.

(물론 상대방이 내 의견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당연히 답은 한다)

들어보고 명확하게 위험하거나 무모하지 않으면

신중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고 하면서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는 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정해 놓고 동의를 구하려고 물어본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말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혀봤자 좋을 건 없다.

내가 하는 말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나의 무게감도 떨어진다는 뜻이다.


재미있게 말하는 걸로 유명한 연예인들도

녹화 때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그중 재밌는 몇 마디가

방송에 나온다는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정말 와닿고 재밌는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꼭 해야 하는 말만

딱 하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다.


이 원칙은 처음 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 사이에서도 꼭 지켜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 말을 전부 다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는 보장도 없다.

타인과 대화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경계를 풀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맞지만

불필요한 말을 길게 늘여놓음으로써

가족들을 피곤하게 만들진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말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실수는 몰라도 말실수는 사람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좌우시키기도 하며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을 장황하게 길게 하다 보면 그만큼 실수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말실수가 잦아지면 신뢰도 추락은 불 보듯 뻔하다.


특히나 스스로를 자랑할 땐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알아서 알아줄 나의 과업을

내 입으로 떠들어대면서 깎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남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는 말할 필요 없이 꺼내지

말아야 할 이야기이고.


무조건 입을 열지 말고 과묵하게 지내자는 건 아니다.

위치에 따라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서서 주장하고, 쟁취해야 할 게 있을 땐 나서야 한다.

그런 것은 분명 구별해야 한다.


지혜는 귀로 들어오고 실수는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우리 모두 명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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