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도, 사람도 낯설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동네 놀이터에 가면
정말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다가다 얼굴만 본 동네 친구도, 같은 학교 친구도
볼 수 있었고 전혀 다른 무리의 친구들끼리도 함께 놀았다.
심지어는 놀이터에 전혀 모르는 애들만 있어도
'나랑 같이 놀래?' 하면 함께 놀았다.
처음 보는 애들임에도 같이 놀자고 하는 게 쑥스러운 일이 전혀 아니었으며
그쪽에서도 나같이 혼자온 애들 끼워서 같이 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놀이는 다 비슷비슷하다.
얼음땡, 땅따먹기, 한발 뛰기, 경찰과 도둑 등등.
(동네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를 수 있습니다)
90년대 중후반, 모든 놀이터가 모래밭이었다.
명절이 지나면 씨름이 잠깐 인기를 끌었고
당시 놀이터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한 놀이기구들이 참 많았다.
녹슨 쇠사슬에 연결된 그네,
어디 하나 날카로운 쇠붙이가 튀어나온 미끄럼틀,
동네에서 힘세다고 소문난 남자애들이
힘자랑 하듯이 돌리던 뺑뺑이(이거 타고 구토한 친구들 여럿 봤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구름사다리, 정글짐.
아, 쿠션감이 약해 꼬리뼈부터 머리끝까지 고통을
그대로 전달해 주던 시소도 있었다.
강자들만 살아남던 90년대라는 말은 놀이터에 한정하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난 뒤 놀이터에 가면 애들이
흡사 배수로 공사를 했다. 물이 고여있는 곳옆에
길을 만들고 그 흙길을 따라서 물이 이동하는걸
깔깔 거리며 봤다.
참 순진한 건지, 아니면 놀게 없어서 그렇게 까지 놀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놀이터는 초등학교 때와는 좀 다르다.
모든 시설이 그대로지만 일단 이용하는 시간이 좀 늦어졌다.
그리고 모든 기구를 이용하진 않는다.
오로지 그네만 탔었다. 그네에 앉아서 친구들이랑 시답잖은 농담을 하다 보면
어찌나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던지..
밤에 놀이터를 지나가면 그곳은 연애의 성지였다.
중, 고생 남녀들이 손을 잡고 데이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부러움 반, 걱정 반이다.
세월은 흘러 이제 놀이터에 혼자 앉아있으면 오해받을 나이가 됐다.
작년 이맘때, 세 살배기 조카와 놀이터에 간 적이 있었다.
매일 지나는 동네 놀이터였는데 유심히 본 적은 없었던 터라
막상 가보니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녹이 많이 슬었던 그네 줄과 미끄럼틀은 아예 재질이 달라져있었고
애들이 모래성을 쌓거나 물길을 내며 놀았던 모래는 자취를 감췄다.
시소도 몰라보게 좋아졌으며 위험천만한 시설들은 사라졌다.
놀러 나간 아이가 다쳐서 돌아오는 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날 확률이 줄어든 건 참 좋은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모래가 사라진 건 정말 다행이다.
낮에는 놀이터의 일부분이지만 밤이 되면 놀이터 모래사장은
온갖 동물 및 곤충들의 서식지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설 말고도 다른 생경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온 것이다.
궁금해서 슬쩍 몇 살인지 말을 건네봤다.
9살이라는 답변에 적잖이 놀랐다. 나는 그 나이 때 혼자 놀이터에 갔고
놀이터에 부모님이랑 함께 온 친구들도 없었다.
그래, 뭐 이건 부모님이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함께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낯설었던 건 그 또래의 아이들이 각자 놀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앞서 잠시 썼지만 혼자가도 늘 같이 놀 친구들이 있었고
모르는 사이여도 함께 놀던 시절을 경험한 나는 그 모습이 어째 삭막하게 느껴졌다.
놀이터에서 노는 순간만큼은 호칭만 형, 누나일 뿐이지
사실 1~2년 차이는 친구였을 정도로 격의 없이 놀았고
심지어 처음 보는 사이인데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지금의 놀이문화가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아이들마다 개성이 다 다르고 그것을 존중해줘야 하는 게 맞다.
다만 내가 느꼈던 그 감성을 지금의 어린이들도 느끼며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놀이터에서 그렇게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협동심과 소속감,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해 가며
배우는 관계 형성 등을 배울 수 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교과서에 적힌 글, 매일 보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배우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만큼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한다.
웃음의 데시벨만큼은 그때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