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도, 힘듦도 한 템포 낮춰주는 마법 같은 음식
찬바람이 불어온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
생각 같아선 나가서 순댓국이나 설렁탕 한 그릇
먹고 오고 싶지만 나가기도 귀찮다.
다행히 집에는 전에 사놓은 어묵이 있다.
아내에게는 정중하게, 그렇지만
먹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요리를 부탁한다.
잠시 후, 눈앞에 어묵탕이 뚝딱 완성되어 나타난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목을 통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다.
마치 수액주사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적당히 탄력 있는 어묵의 식감은 더할 나위 없고,
함께 넣은 무도 간이 다 배어있어서 주인공 못지않은 조연 역할을 해낸다.
추위가 찾아오면 안 좋은 점도 있지만
어묵탕을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장점도 있긴 하다.
한국인들 중 이 요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도 이 국물요리 한입 하는 순간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어묵탕도 맛있지만
대개는 술집에서 먹는 경우가 더 많다.
가수 지아가 부른 '술 한잔 해요'를 들어보면
'따끈따끈 국물에 소주 한잔 어때요'라는 가사가 나온다.
듣기만 해도 술집의 풍경이 그려진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막 들어온 사람의 안경에는 김이 서리고,
국물과 어묵을 안주 삼아 한잔 두 잔 마신다.
시간이 흐르고 소주병이 비워지는 만큼 국물의 양도 줄어든다.
불에 졸여진 국물이 짜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짠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가게는 육수를 리필해주기도 하고
어떤 가게에선 그런 게 없어 그냥 사람들이 물을 붓기도 한다.
그렇게 채워진 국물에 또 한 번 사람들은 술잔을 채운다.
나름 유익한 술자리였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입에서 느껴지는 술 냄새와 어묵탕의 냄새가 그리 거북하진 않다.
이 매력적인 음식은 길거리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노상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팔고 있으면
꽤 높은 확률로 어묵 꼬치도 함께 판다.
떡볶이만 주문해도 사장님들은
"날씨가 추우니까 국물 한잔 떠서 드세요"라고 권한다.
속도 따뜻해지고 마음도 따뜻해진다.
국물 한잔 마시면 홀린 듯이 어묵하나를 집어든다.
긴 막대형이든 꼬불꼬불하게 접힌 네모형이든 그냥 맛있다.
호떡과 붕어빵 못지않게 이 음식이
겨울 대표간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스키장과 썰매장에서 먹는 어묵 또한 기가 막힌다.
아무리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감았어도
찬바람을 가로지르며 내려온 우리의 몸은 춥다.
잠시 쉬는 시간, 따뜻한 국물과 어묵을 한입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풀리고
다시 한번 신나게 놀 수 있는 기운이 충전된다.
일병 때 혹한기 훈련을 나간 적이 있었다.
영하 15도의 강추위 속에서 잠을 잤다.
3박 4일 일정의 마지막은 야간 행군이었다.
지칠 대로 지치고 춥고 배고픈 우리들의 육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바로 따뜻한 어묵탕이었다.
취사병들이 미리 가서 어묵탕을 만들어 놓은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던 것.
그렇게 지쳐있고, 걷는 내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욕을 내뱉던 사람들이
국물 한 모금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풀려있거나, 혹은 표독스러웠던 눈동자엔 생기가 돋고
저주를 퍼붓던 입가는 미소가 번졌다.
과장이 아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따뜻한 국물이 선사한 마법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전역 후에도 있었다.
아는 형의 일을 도와주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
휴게소에 들러 어묵 우동 한 그릇씩을 먹었다.
고된 노동 후 먹었던 그 우동맛은 한동안 계속 내 머릿속에 남았었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맛이지만
땀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 생각하니 더 맛있었다.
휴게소가 아닌 그냥 집 근처에서 한 끼 때울 겸 먹었어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씩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에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거기서도 종종 어묵탕을 주문하는데 한국 스타일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물론 그 음식점도 정통 일본식을 내놓을 리 만무하고
분명 한국스타일을 어느 정도 가미하긴 했겠지만
우리네 스타일과는 다르다.
재밌는 건 이자카야에서 나오는 어묵탕은
어묵의 종류도 더 다양한데도 한국 스타일이 더 좋다.
프리미엄, 정통 이런 이름 붙어있는 것보다
정말 서민적인 어묵탕이 더 내 입맛에 가깝다.
다가올 겨울, 추운 날씨 때문에 고생도 하겠지만은
그래도 찾아보면 분명 장점도 많은 계절이다.
예컨대 '어묵탕을 먹기에 가장 좋은 계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