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마주한 순간, 내가 보였다

by 이은
심연을 걸어보다

최근 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

사소한 일에도 생각이 깊어지고, 불안은 작은 틈만 보여도 스며들었으며, 하루를 마치면 이유 모를 무거움이 가슴에 남았다.

겉으론 조용히 지내지만 속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

으레 모두가 겪는 감정의 파동 정도라 여기려 했다. 하지만 그건 피곤이나 스트레스 같은 가벼운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는 감정이라기보단, 내면의 심연에서부터 떠오르는 짙은 어둠과 더 가까웠다.

그 어둠을 혼자 품고 흘리기엔 내가 너무 지쳐있었다.

여태껏 ‘나는 단단하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붙잡아오던 주문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지탱해주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조용히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내 마음에 얽히고설킨 매듭을 풀어보고 싶어서였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상담소의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차오르는 눈물에 화장실로 달려가 심호흡을 하였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긴 싫었단 말이다.

하지만 짧은 다짐이었던 탓일까, 상담사가 건네는 따뜻한 첫인사에 나는 내 목소리보다, 눈물로 먼저 인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나 힘들어요’ 하며 내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상담사의 부드러운 시선과 차분한 목소리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서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첫 상담 50분, 현재 내가 느끼는 나의 마음의 상태와 최근 겪었던 폭풍 같던 날들을 모조리 말하기에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첫 회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미묘한 변화의 조각을 느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이 과정을 밟다 보면 나에게 힘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반신반의하며 나는 또다시 상담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세 번째 회기...

회차를 거듭할수록 나는 상담사가 내 오랜 지인인 양 내 말을 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이 혼자서 바로 설 수 있다고 여겼던 내가 사실은 마음속에서 SOS를 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두서없이 써 내려간 내 마음의 기록과 함께 어쩔 땐 말보다 마음이 먼저 쏟아지고 눈물이 먼저 흐르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를 이해받는 느낌과 여전한 어색함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저 그 공간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한 조각이 풀리고, 내 안의 무겁던 감정이 조금씩 흘러나가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상담소를 갈 때마다 ‘정말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기도 했지만 막상 상담을 받고 나오면 나는 정말 여기 오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을 마주하다

나는 요즘 내 감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걸 느낀다.

최근까지의 내 울음과 눈물은 그저 참아야 하는 것, 부정적인 것, 참지 못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마음이 벅차오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답답함이 너무 커서 나는 그 감정에 휩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눈물은 파도처럼 나를 잠식시켰다.

‘왜 이렇게 힘들지? 왜 나만 이러지?’

참아야 하는 감정이라 치부하며 억눌러왔던 눈물은 나를 삼키려는 듯했지만, 사실 내 안에서 흘러나와야 했던 자연스러운 울음이었다. 억누르려 했던 만큼 더 터뜨려야 마땅한, 내 생존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더 쉽게 눈물을 흘리며 운다.

내 감정을 마주하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 지금 나 슬프구나. 참지 말고 울자. 괜찮아.’라고 온전히 인식하며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눈에선 같은 눈물이 흐르지만 그 주체는 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 감정을 바라보며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이 울음, 슬픔 그리고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성장과 회복력의 증거다.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그동안 써 내려갔던 상담일기를 꺼내보았다.

'... 이렇게 깊고 무겁고 우울한 감정이 깔린 내 모습이

그걸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꼭 부정적인 게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는 내 감정을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사람이면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외면하고 억누르려 했던 내가 문제였음을.

그리고 이제 나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숨겨진 불씨를 깨우다

어느 날의 상담에서 문득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참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의문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 세상 속에서 조용히 싸우던 작게만 느껴지던 나 자신이 이런 말은 난생처음 들어봤다.

에너지가 있다는 말은 외향적이고 대범하다는 류의 말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내 삶을 움직여보려 하고 결심하고, 바꿔보려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 말이 참 묘하게 나를 뜨겁게 했다.


상담사는 이어 말했다.

“당신은 자원이 좋은 사람이에요”

자원이란, 내 안에 움직일 힘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피드백을 받아도 튕기지 않고, 칭찬을 들어도 부정하지 않으며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

나는 상담사가 내게 해주는 칭찬이 감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조차 자원이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나였다. 마치 상담사에게 공식적으로 확인받은 듯한 느낌에 상담 내내 가슴이 벅차고 뿌듯함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왜 마음대로 안될까? 왜 나는 쉽게 털어내지 못할까? 왜 나는 이렇게 어려울까?’

그런데 상담사의 말 한마디가 나를 달리 보게 만들었다.

평소 나 자신을 탓하고 답답해하던 마음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었다.

내가 항상 고민하고 다시 결심하며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채로 마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나는 나를 믿고, 내 삶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작은 성공도 만들어내는 사람이구나.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온 내 삶이 조금씩 의미를 갖는다는 걸 깨달았다.


최근 나는 감정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안 좋은 마음은 종이에 써서 마음껏 찢어보고,

울고 웃고, 내 감정을 온전히 인정해 주고,

마음을 콘크리트처럼 두껍게 덮어두지 않고, 내 마음에게도 누울 자리를 만들어주기 등...

작은 변화를 실감하며 조금씩 나는 건강해지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에너지와 자원이 이렇게 살아있음을, 오늘도 나는 다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