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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히나 Oct 30. 2022

의궤의 표지가 직물이라고?

직물 보존학

의궤: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책. (출처: 한국민족대백과).


    석사, 박사과정을 통틀어 대학원 생활 중 나에게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진학했던 첫 해, 첫 학기, 첫 달에 있었다. 당시 내가 들어간 연구실에서는 미대와 함께 하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규장각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사람이 별로 없던 연구실이었던 터라 나는 비공식 인력으로 따라가서 프로젝트의 마무리 단계를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었다.

 

의궤의 표지가 직물이라고?

    당시 그 프로젝트에서 우리 연구실이 맡은 부분은 의궤의 표지로 사용된 직물에 대한 분석이었다. 의궤는 책인데 책의 표지가 직물이라니. 책은 당연히 종이로만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철저히 부슨 사건이었다. 물론 나중에 전직 사서셨던 엄마를 통해 제본할 때나 장정할 때 같이 의외로 책에 천이 자주 사용된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이 조선시대에도 그럴 줄은 몰랐었기에 그 사실이 당시엔 너무나 신기했었다. 그리고 놀라웠던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기록물들을 한 권이 아니라 똑같은 내용으로 약 세 권정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화재나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자료가 유실되는 것을 염려하여 각각 다른 장소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당시엔 컴퓨터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백업 파일을 손글씨 ver.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데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기록을 남기는 데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의궤는 글뿐만 아닐 그림도 있는데 이것도 똑같이 여러 권을 만들었다. (화공들의 손목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임금이 보는 용도로 만든 책을 '어람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드는 거라면 어떻게 만들까? 상대방이 보기 더 좋게 만들지 않을까? 게다가 그 대상이 나의 윗사람이라면? 표지도 신경 써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그 당시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프로젝트에서 분석했던 의궤들의 표지는 면(綿)이나 마(麻) 같이 대중적이고 저렴한 소재부터, 흔히 실크라고 부르는 고급 소재인 견(絹)까지 다양했다. 특히 '어람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그중에서도 견직물로 만들어진 것들로 가장 기본 직물 조직인 평직으로 된 '분상용(일반용)' 의궤와 달리 문양이 있는 원단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미묘한 차이들이 잘 모르던 내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던 터라 참 흥미로웠다.

    사실 의궤는 전통 복식 연구에 꽤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다. 고문헌들에서 복식과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된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의궤의 경우 그 복식에 대한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그림들이 흑백이 아니라 색까지 입혀진 것들이라 형형색색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의궤가 유물들 중에 유독 해외로 유출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중요한 사료(史料)인 의궤가 내용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인 면으로도 의류와 연관된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직물 보존학'의 존재를 깨닫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류 소재가 사용되는 곳이 많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유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섬유 유물의 수는 다른 종류의 유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그 이유는 섬유가 철기나 목재, 석기 등과 같은 물질보다 그 수명이 짧아서이다. 그리고 직물 보존학은 '보존 과학'의 한 분야로 직물 문화재들의 보존과 복원에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용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연구 분야이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보존을 위해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온도 20±2℃, 상대습도 45% 이하)에서 보관된다. 그리고 보존 및 복원 과정은 유물의 현 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실행되는데 훼손이 많이 된 유물일수록 처리 작업이 신중히 이뤄진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땅 속에 매장되어 발굴된 '출토 유물(出土遺物)'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 외에도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전세 유물(傳世遺物)'이나 불상 및 탑 내부에서 발견되는 것들도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독특한 매장문화 덕분에 유물들이 완전히 밀봉된 진공상태에서 장기간 동안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보존되어 발굴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타임캡슐 같다.) 

    개인적으로 직물 보존학을 공부하면서 흥미로웠던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섬유의 분해 양상과 달랐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공기와 차단된 상태에서 면, 마, 견, 모 등과 같은 천연섬유(Natural fiber)들의 경우 약 500년 정도까지도 유지된다고 한다. (진공이 아닌 일반적인 상태에서의 천연섬유의 분해 기간보다 훨씬 길다.) 반면, 천연섬유보다 자연 분해되는데 보다 오래 걸리는 인조섬유(Man-made fiber)는 19세기쯤 되고서야 발달이 된 터라 근대 유물에서나 발견되는 편인데 의외로 천연 섬유보다는 중간중간 끊어져서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더 높다고 한다. (그래서 학예사이신 연구실 선배님께서 "천연섬유가 최고"라고 하셨었다.)

    '직물 보존학'은 사실 텍스타일 연구 분야에서도 다소 마이너 한 학문이다. 마찬가지로 직물 문화재와 밀접한 연구를 하는 한국 복식을 전공자들과 일정 부분 겹치는 분야이기도 한데, 다만 텍스타일 연구자가 하는 직물 문화재 연구는 섬유 소재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중점으로 하는 반면, 한국 복식 연구자는 직물 문화재의 외관을 바탕으로 역사/문화적 분석을 다룬다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의류학 이외의 학문으로는 고고학 분야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섬유의 수명이 다른 물질들에 비해 짧은 특성상 고고학에서도 비중이 작은 분야인 듯하다. 전문성이 있는 분야인 만큼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에 반해 취업할 수 있는 직업군이 워낙 적다 보니, 솔직히 가성비가 별로인 학문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을 좋아하고, 문화를 좋아하며, 의류를 공부한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학문이었고, 장기적으로 볼 때 필요로 하는 학문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나에겐 굉장히 의미가 있고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학문 분야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성비는 최악인 분야이다... 슬프게도.)


필수는 아니고 참고하면 좋을 서적들

*사실 시중에 직물 보존학만을 따로 다룬 서적은 없고, 보존과학과 관련된 책들 중 섬유˙직물 문화재에 대해서 일부 다룰 뿐이다. 때문에 아래의 목록은 문화재청 및 국립 박물관들의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섬유˙직물 분야 관련 간행물들로 대체한다.


<가죽문화재 식별분석> 국립고궁박물관

<천연섬유 모피 식별 아틀라스> 국립민속박물관

<직물보존 1>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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