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눈은 녹고, 돌담은 남는다

견딜 시간을 허락하는 마을

by 인생클래스

겨울 순례길은
걷는 이가 많지 않다.


3일 걷는 동안
각각의 숙소에서 혼자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아스트로가(Astorga)의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마치 <국제시장〉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호주, 남아공, 이탈리아, 영국,
폴란드, 덴마크, 리투아니아, 스페인….


국적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저녁 무렵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공간이,

순례길 특유의 소음과
웃음으로 가득 찼다.


반가웠다.

이 코스를 마치기 전,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할
마지막 기회 같았다.


지난번 삼계탕의 실패를 떠올리며
이번엔 욕심을 버렸다.


쉽고 든든한 선택—
스테이크와 소시지.


걷는 이들에게는
복잡한 맛보다
힘이 되는 음식이 필요하다.


결과는 성공.

모두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코리아 썸즈업"을 외쳤다.


순례길에서의
첫 성공 요리이자,
아마 마지막 요리가 될 것이다.


마음의 짐 하나를 내려놓은 채
아침에 아스트로가를 나섰다.

밤새 눈이 내렸다.


무리아스(Murias) 지방으로 접어들자
눈발은 더 굵어졌다.

도로 옆 좁은 순례길을 따라
지루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혼자 걷는 곳엔 소리는 사라지고,
발자국만 남는다.


걷다 만난 호주와 영국에서 온 친구들은
1년 휴가 중이란다.


그들은 이번이
세 번째 순례라고 한다.


겨울이라 닫힌 숙소들을 가리키며
지난여름 자기가 이곳에서 묵었다고 기억을 나눈다.


잠시 들른 바에서
물었다.

"긴 기간이라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니?”

아이들은 이미 독립했고,
아내와는 별거 중이라
문제없단다.

자유로운 영혼일까,
아니면 각자의 아픔을
이 길에 내려놓으러
온 걸까.


언덕이 높아질수록
눈은 더 쌓였다.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 부근에서는
눈이 너무 깊어
전통 순례길을 포기하고
자동차 도로를 걸었다.


라바날(Rabanal) 근처에서
두 갈림길이 나왔다.

어제처럼,
망설임 없이
긴 길을 택했다.


한 시간쯤 걷고 있는데
현지인이 차를 세우고 알려준다.

"그 길은 잘못된 길입니다. 위험합니다."


당혹스러웠다.

가던 길 되돌아 나와
다른 길로 걸어
라바날에 있는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


길을 잃은 걷는 이를
걱정해
차를 세워주는 따뜻함—

라바날은
그런 곳이다.


덕분에 내일은
32km,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가야 한다.

이번 여정 중
가장 높은 산맥,
해발 1,515m를 넘는다.


저녁의 바람은 거칠었고,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내일의 눈길을
걱정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걱정하지 말자.

가장 높은 산을 오르는 방법은
늘 같은 원리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라바날 델 카미노는
중세부터
환대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크루스 데 페로로 오르기 전,
순례자들이
숨을 고르던 자리.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마리아 교회는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이곳의 돌담은
말이 없고,
대신 오래 버텼다.

전염병과 전쟁,
굶주림을 지나
오늘까지 남았다.


잠자리에 들자
낮에 들은
'별거'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철저히 외롭기 위해
의도적으로 꺼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은
아내에게
메시지 하나쯤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늘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랑해."


보내기 전,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아니다.

지금 한국은
깊은 새벽이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는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썼다.

"잘 걷고 있어요.
별일 없지?"

마음은
늘 이렇게 번역된다.


속내와 다른 문장으로.

송신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다시 배낭 속에 넣었다.


라바날의 밤은
조용했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직장에서 무고하게 밀려났던
감정을 함께 데려왔다.


설명되지 않은 결정과
닫힌 문.

분노는
눈처럼 쌓였다가,
오르막에서
서서히 녹는다.


라바날은
이겨내라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견딜 시간을
허락한다.


눈은
언젠가 녹고,
돌담은 남는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도
자리는 바꿀 수 있다.


판단을 내려놓고,
발밑에 두고
걷는다.


내일은
철의 십자가(크루스 데 페로).

돌 하나를 내려놓는
의식이 기다린다.


오늘,
나는 한 가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다음화

제25화- 눈보라 속 철의 십자가

이전 23화23화-눈보라 속의 길, 그리고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