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의 방, 그로달레 글. 스베인 뉘후스.위고. 2021-
우선 한 소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소녀가 그 기억을 잊기를, 아니 어쩌면 끝까지 잊지 말기를, 그리고 끝이 없을만큼 커다랗게 성장하기를 그래서 결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읽기 힘든 그래서 그냥 잊고 싶은 텍스트들이 있다. 내게는 페트릭 네스 원작의 영화 '몬스터 콜'과 샤를로트 문드리크의 그림책' 무릎딱지'가 그랬다. 두 작품이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내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일인가보다.
'문어의 방'도 그랬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리뷰를 작성하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한번 읽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곱씹는다는 것이 그 예쁜 아이에게 죄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아이의 상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태도 역시도 일종의 가해가 될 수 있다고 다시 생각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 더욱더 적극적이어야 하고, 사회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으로 글을 쓰지 않으려 했다. 아니, 다시한번 그 아이의 상처를 하게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 우연히 tv에서 한 소녀를 보았다. 그 소녀는 책 속이 아닌 현실에 있었다.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소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 나오고, 가해자가 보이고, 그리고 그 소녀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들렸다. 소녀는 이야기했다.
"사랑한다"고,
"그 아저씨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라고,
사실 위의 두 문장의 말들은 대부분의 피해자가 가스라이팅을 한 가해자에게 흔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아래의 이 한 마디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어른들에게 욕먹는 것이 익숙하다고"
세상의 누구도, -더구나 피해자가- 누군가에게 욕먹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없다. 더구나 소녀는 피해자이다. 16세 소녀와 성관계를 한 아빠 친구와 그 사건을 둘러싼 주위사람들의 반응들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이들에게는 특히나 냉혹하다. 그 소녀의 환경이 바로 다른 이들의 그러한 태도를 만들었다.
'문어의 방'은 친족 성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표지에 그려진 문어의 먹물이 퍼져나가는 과정은 이 책을 읽고 나면 더욱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 그림책 속에서 금같이 아름답던 아이는 그 사건으로 자신을 잃는다. 그때 아이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단 한사람이었던 엄마는 아이에게 당연히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새 힘을 얻고 건강하게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속의 가해자와만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소녀는 상황이 더 안좋다. 부디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빈다.
물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두 작품 모두 감각적인 문체를 비롯해서 잘 쓰여진 아름다운 작품이다. 좋은 작품이다. 문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니 말이다. 그 작품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특유의 탐미적인 성격을 더욱 드러낸다. 나는 문학작품은 상징과 은유등으로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와같은 작품을 통해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이 사건은 위의 작품들을 읽었을때와 같이 어떤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질문이 다소 관념적이었다면, 사건에 대한 질문은 보다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에서 그와같은 일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피해자가 다시(?) 잘 살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어떤 일들을 도와주어야 할까" 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더 정확한 질문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해답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정확한 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한번 소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