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문장들-
‘마음이 아플까 봐’- 병이 비워지고 의자에 앉기까지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나는 여름을 정말 좋아한다. 푸르름으로 빼곡한 산과 그 산 안으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씩 들여놓는 일이 너무 좋다. 집에서는 여름의 기운을 느끼면서 거실바닥에 누워서 책을 읽기도 한다. 그럴 때 먹는 자두나 복숭아는 꿀맛이다. 한여름이면 땀을 흘리며 도로 아래에 마련된 자전거 길을 한 두 시간을 걷기도 한다. 뜨거운 햇볕을 직접 맞지는 않지만, 넓게 펼쳐진 강가를 볼 수 있는 그곳을 정말 좋아한다. 여름이 떠나갈 것이 예정된 8월 말 정도가 되면 늘 아쉽다. 여름을 더 아끼고 더 잘 지내볼걸하는 후회가 급속도로 밀려온다. 그러나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오는 상실감만큼 아프지는 않다. 바로 다음 해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 제퍼스의 ‘마음이 아플까 봐’는 상실감을 딛고 그것을 추억으로 만드는 일에 대한 그림책이다. 소녀에게 할아버지는 아주 가깝고도 큰 존재였다. 할아버지와 세상의 모든 일을 기쁘게 공유했던 소녀는 언제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늘 앉아있던 의자가 텅 빈 것을 보게 된다. 이후로 소녀는 마음을 병 속에 담아놓고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녀는 말도, 웃음도 호기심도 기쁨도 잃고 살아간다. ‘마음이 너무 아플까 봐’ 마음을 조그만 유리병 속에 넣어놓고 다시는 꺼내 보지 않는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사랑도 호기심도 없는 어른으로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 도움으로 병 속의 마음을 꺼낸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앉게 된 소녀는 책을 쌓아놓고 읽는다. 책을 읽는 뒤편으로 할아버지와 나누었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의 세계가 가득하다. 이제, 의자는 채워졌고, 병은 비워졌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 역시도,
이제 의자는 채워졌고
병은 비었습니다.
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마음을 작은 병에서 꺼내고 세상의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일까? 그 마음을 꺼내지 못한 이들도 많고, 의자에 앉지 못하는 이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소녀는 이제 그 의자에서 어린 시절 할아버지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될까? 그림책 앞 뒤로 빼곡하게 그려진 할아버지와의 일상에 대한 그림이 아프다. 상실을 아파하고 견뎌내는 텍스트는 언제나 아름답다.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가 그렇듯이 말이다.
다시 여름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언젠가 최은영의 단편 ‘그 여름’을 정말 아프게 읽었다. 이야기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고, 한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레 바뀌고 이별하면서 다시 마음을 빼앗긴 다른 이와 사귀게 되고 그와도 헤어지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그러면서 먼저 사귀었던 연인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생각하고 추억하는 어쩌면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다. 그 과정을 너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내내 내가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되어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것 같은, 그래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 연인에 대해 정말로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다른 작품과 다른 것이 있다면(아님 요즘은 이런 구도가 많지만)두 사람 다 여성이라는 것이다. 즉, 퀴어소설이다. 이 소설이 여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데 처음 두 사람이 만난 여름이 마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의 여름 풍경을 연상케 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의 매미 소리가 아찔한 하늘 아래서 야구를 하는 풍경은 최고의 여름 풍경이다. 이 소설도 헤어진 한 사람으로 인한 상실감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추억으로 생각되는 장면이 있다. 그런 경험들이 모여서 우리는 세상을 깨닫게 되는 걸까?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된다면 세상을 깨닫는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하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는 ‘마음이 아플까 봐’다시는 읽기 못하는 책이나 영화가 있다. 샤를로트 문드리크의 ‘무릎딱지’와 영화 ‘몬스터 콜’(소설도 있지만 읽지 못하고 영화로만 보았기에) 이 바로 그것이다. 그 슬픔을 나는 감당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