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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인더미러 Jun 27. 2024

EP.04 부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

"너도 과거에 잠식되어 있구나"

얼마 전, 사촌 형과 술 한잔 하며 나눈 이야기 중에 들은 말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년시절부터 난 아버지에게 사랑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결코 사랑해주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이 가고 싶어서 1년 내내 졸라도, 단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고

몇 년 만에 처음 목욕탕에 갔을 때, 장난을 친다고 차가운 물을 아버지 등에 부었는데

초등학생 2학년 아이에게 쌍욕을 하셨다.

(아버지는 어린 내 손바닥에 대고 장난감 BB탄총을 쏘시던, 아주 장난기 없으신 분도 아니었다)


학창 시절 가족여행을 간 기억은 전무하며, 그나마 친척들 또는 아버지 계모임을 통해

여행을 간 것이 다섯 손가락을 꼽는다. 또한, 여행에 가서도 가족과의 화합보다는

친척들이나 친구들과 술을 드셨고, 아버지만 술이 덜 깨서 우리 가족만 남아 하룻밤을 더 자고

나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나름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도 종종 놀아주셨지만, 세상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려야 한 번 놀아주시곤 했기 때문에

나도 지칠 대로 지쳤던 것 같다. 그래서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니 갑자기 "이제 우리 공부하자"며 갑자기 거리를 좁히셨다.

그렇게 다가가려 해도 좁혀지지 않던 부자사이였는데 갑자기 거리를 좁히시다니,

처음엔 황당했지만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포장하여 아버지는 정말 능수능란하게

나를 가스라이팅하고, 학업과 관련하여 압박하였다.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깝다며

영어단어를 외우게 했고, 야간자율학습-학원-집에 도착하여 밤 1시가 되어 씻고 자리에 누워

핸드폰을 본다던가 신문을 보는 행위조차 못하게 하였다.

단순히 못하게 했던 것이 아니라, 본인의 유년시절과 비교하여 끊임없이 나를

끈기가 약한 아이, 승부욕이 없는 아이, 학업성취도가 부족한 아이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어 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학원 선생님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구 앞에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내가 10년 이상 지켜본 당신은 자기계발에는 조금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그저 퇴근 후 술을 마시거나 누워서 티비를 보는 게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나를 비난했다.

자신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비교하면 나는 발끝만큼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질책했다.

(아버지는 고졸로 9급 공무원 출신이었으며, 나의 대입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3년간 시험준비를 하고 있으셨다)


입시결과가 좋지 않았고,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지방 국립대에 합격을 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서 대학생활을 상상하니, 숨이 막혔다.

그리고 1년간의 지옥같은 수험생활을 끝내고 서울소재 4년제 대학에 입학하였다.


집을 나오면서 결심했다. 아버지의 마인드셋과 지금 시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알려준 교훈대로 인생을 살게 되면 내 인생은 정말 망해버릴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해서 세상을 직접 바라보고 배우겠다고.


그 뒤에 내가 대학시절을 하는 동안,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본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강조하며 나의 자존감을 짓밟았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와 있는 모습을 보면 꼭 잔소리를 하셨다.

그래도 학비와 용돈을 다 지원해 주셨던 것은 감사했기 때문에, 고시원에서 지내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의 고향친구A가 전세 2억의 신축 오피스텔에 살며 쾌적하게 공부하는 것이 너무 부러웠지만

집안의 형편을 잘 아는 나는 부모님에게 그런 투정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대학교 졸업식 날 사건이 터졌다.

부모님께서 내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서 올라와, 내 자취방에서 함께 잘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정도면 엄청 살기 좋다"며 본인의 유년시절과 비교하면 고생도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고시원은 옆방에 같은 학교 친구들도 많은데 왜 친구처럼 지내지 않냐며

"옆방사람들과 인사도 안 하는 너는 참 씩씩하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나였으면 이미 벌써 다 친구로 만들어 화기애애한 고시원 분위기를 만들었다"라고 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때부로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렸다.

(고시원은 조금의 소음도 피해가 될 수 있기에 극도로 조심하며 지내야 하는 곳이다)


내가 원하던 대기업에 4전 5기로 마침내 취업을 했다.

집안이 경사 분위기였다. 어머니께서는 고기반찬을 하셨고, 아버지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나는 뿌듯했고 드디어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다는 것에 조금은 떳떳했다.

식사를 하며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가슴에 아직도 맺힌다

"대기업은 수명이 짧으니 회사 퇴직 후의 길도 지금부터 생각해야 한다"

내가 고1 때, 무턱대고 공무원을 그만두시고 3년 동안 시험공부를 하셨던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남아있는 기대마저 저버리게 되는 두 번째 순간이었다.


행복하고 축하해야 하는 날에 본인의 불안감을 아들에게 전이하는 모습을 보고

난 우리 아버지가 정말 악마라고 생각했다.

내가 인생을 그토록 불안해하며 살아왔던 걸 옆에서 보셨으면서도,

취업한 그날마저 또 나를 불안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에도 아버지는 수 차례 나를 가스라이팅하며 내 자존감을 짓밟았지만

더 이상 내게 통하지 않았고, 부자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물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이 다행일 정도로 소리 지르며 서로 비난하며 싸웠다.

그 뒤 아버지도 더 이상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으셨는지

이제는 부자간의 대화는 일절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은지도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과거의 일이 너무나도 또렷해서 매일 분노한다.

내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가 떠오를 때면 혼자서 아버지를 비난한다.

나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아프시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사고가 있거나 해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먹는데 그리 큰 어려움이 수반되지 않았다.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경제적)만 하고 살아가며 더 이상 그의 불안을 전이받거나,

자존감이 짓밟히기 싫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장신적 관계를 끊어내고, 나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난 나 자체로 온전하다. 

부모의 그늘에서 헤어져나올 것임을 오늘도 결심한다.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가 있으신가요?

좌절과 원망은 같은 감정이라고 합니다.

원망하느니 차라리 좌절합시다.

좌절은 다시 일어난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만

원망은 평생 우리를 갉아먹습니다.

모두 행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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