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작년에 친구와 함께 일러스트 페어에 간 적이 있다.
그전까지는 학교에서 열리는 취업박람회 같은 행사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페어’가 정확히 어떤 분위기인지, 그 안에서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잘 몰랐었다. 그런데 그날, 수많은 부스 사이를 누비며 다양한 작가님들의 개성 넘치는 그림체와 그에 맞춰 꾸며진 부스, 명함 하나까지도 고유의 분위기로 디자인된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후로 나는 ‘페어’라는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피엑스포 얼리버드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고민할 틈도 없이 표를 예매했다.
'전문가들만 가는 자리가 아닐까, 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구경만 하다 돌아오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커피와 차를 좋아하는 내가 과연 어떤 경험을 하고 올지 설렘과 기대감이 조금 더 컸던 것 같다. 가보지 않은 세계에 들어서는 일은 언제나 망설여지지만 어쩌면 그런 불안을 넘어서 보는 게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어에 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켜고 서울행 기차표를 예매하고, 참가 카페 리스트를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낯선 이름들 속에 얼마 전 우연히 방문했던 <원스타임오프>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이름이 주는 반가움에 부스 위치를 따로 메모해 두었다.
새벽 6시, 아직 어두운 하늘 아래 집을 나섰다. 기차 안에서는 지난해 페어 영상을 보며 미리 분위기를 파악해 두었다. 코엑스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앞에는 놀라울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입장 대기줄이 건물 저 끝까지 뻗어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이게 다 줄인가?’ 싶을 정도로 놀랐지만, 막상 줄은 빠르게 줄어 20분 뒤에는 나도 입장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넓은 전시장을 마주하자마자 약간 현기증이 밀려왔다. 부스는 천 개가 넘는 것 같았고, 입장할 때 챙긴 부스 배치도를 펼쳐보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서 오히려 머리만 더 어질어질 해졌다. 결국 계획을 내려놓고 ‘그냥 끌리는 데로 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페어라지만 단지 커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디저트 부스도 간간히 있었고, 홈카페 용품, 찻잔, 티포트, 그라인더 등 다양한 도구들도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집중해서 돌아본 건 단연 커피 시음 부스였다. 요즘 한창 빠져있는 에티오피아 원두를 중심으로 핸드드립, 라테, 콜드브루를 시음했다. 같은 산지의 원두여도 브랜드에 따라 향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점이 신기했다.
커피를 연이어 시음하다 보니 카페인이 쌓이는 느낌이 들어서 차 부스로 넘어갔다. 커피존과 티존은 구분되어 있었고 덕분에 멀리 돌아가지 않고 한 구역에서 각양각색의 차들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만큼 차도 아주 좋아하고, 카페인이 잘 받아서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는 타입이다. 때문에, '티(Tea)'존에서 좀 더 초롱초롱한 눈으로 구경했던 것 같다.
그중 시음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차는 ‘청귤라임’ 차였다. 여름에 차를 우려서 각얼음을 3-4개 동동 띄워 더운 날 한 잔 딱- 마시면 너무나 개운할 것 같았다.
언니가 바리스타로 일하기도 했고, 가족 모두가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사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지갑사정이 궁한 만큼(…) 마음을 다잡고 충동구매는 최대한 자제했다. 나는, 엄마에게 선물할 꽃향기가 나는 원두와 지인들에게 줄 티백 몇 개를 구매했다.
커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아할 뿐인 내가 이런 전문적인 페어에 가도 괜찮을까? 그런 망설임 속에서 시작된 발걸음이었다. 찻잎의 색깔과 향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고, 커피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 줄 몰랐다. 그만큼 이 하루는 나에게 더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마시고, 직접 느꼈다.
그날 본가로 돌아와, 그 재미난 이야기보따리를 엄마에게 시시콜콜 풀어내며 나도 모르게 신나 있었다.
오늘 다녀온 커피페어의 경험은 나에게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감각의 잔치였다. 그리고 한 번의 용기가 나를 조금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P.S
서울 종로에서 운영 중인 <헤르만의 정원>이라는 카페에서 커피페어에 참여하여, 시음해 보고 구매한 밀크티인데 향도 좋고, 진-하고, 보관기간도 꽤 길어서 두고두고 맛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서
근처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꼭 재구매할 계획이다.
빈티지한 로고와 귀여운 유리병 디자인까지 너무 마음에 들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