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휴학일기 06화

기록문구페어, 기록하는 사람의 주말

나의 다이어리 한 칸에 자리한 하루

by 사이


정오를 훌쩍 넘겨 눈을 떴다. 휴학 중인 요즘엔 늦잠이 익숙해졌지만, 침대 위에서 무심코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급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전주에서 열리는 ‘기록문구페어’의 마지막 날이라는 소식을 봤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이 행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시간이 넉넉하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저 미뤄두었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되었다.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서 다이어리만 해도 여섯 권이 된다.

그 안에서 일상의 단상이나 짧은 문장, 스쳐가는 장면들을 채워 넣는 일이 내겐 익숙한 일상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페어를 놓친다면 오래도록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페어는 6시에 종료된다. 한 시간은 이동에, 한 시간은 준비에 쓰일 것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포기하고 '역시 나는 항상 이래'라며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하루를 자기혐오에 빠져 흘려보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다소 촉박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보고 오자.'


그렇게 다짐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씻는 시간을 줄이니 삼십 분만에 채비가 끝났다. 바로 서둘러 나섰지만 버스를 기다리고, 길을 찾는데 시간을 소모하다 보니 행사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기록문구페어는 1층 규모의 행사장에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전시장, 하나는 판매부스였다. 입구 오른편에는 행사 기획자 세 분의 실제 방을 옮겨 놓은 듯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펜, 다이어리, 작은 메모지들이 놓여있었다. 각자의 일상과 취향이 그대로 녹아든 공간이었다. 그 방에서라면 하루를 정성껏 기록하는 일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행거를 따라 늘어뜨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옆에는 크레파스가 준비되어 있었고, 누구든지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페어답게, 참여와 공유가 자연스러운 구성들이 곳곳에 있었다. 기획자의 방 구역에는 포스트잇과 펜이 비치되어 있었고, 관람자들이 자신의 문장을 남기고 벽에 붙여둘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토마토 Zone

전시장의 깊숙한 공간엔 인상적인 섹션들이 있었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주제별로 정리한 앨범엔, 짧은 글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한 장면을 담은 글과 이미지의 조화가 좋았다. 또 다른 한 공간에서는 ‘토마토’라는 한 가지 사물에 집중한 테마가 펼쳐졌다. 작가 서은지 님의 ‘토마토존’이었다. 이곳에는 토마토 키링, 노트, 향수 등이 한데 전시되어 있었고 그 옆에 적힌 작가의 문장은 이랬다.


“토마토가 처음 미국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그 낯선 모습에 독초라고 오해하며 두려워했다고 해요. 이처럼 사실이 아님에도 막연한 두려움으로 굳어진 믿음을 ‘토마토효과(Tomato Effect)’라고 부른답니다. 혹시 우리도 마음속에 공포의 토마토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낯선 것에 대한 오해와 경계, 그로 인한 거리감.

하지만 진실은 토마토처럼 다정하고 달콤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토는 수분이 많고 다양한 요리에 사용되며 누구나 즐기는 식재료다. 처음엔 낯설어서 무섭고, 편견과 오해를 갖기도 했지만 결국 가장 널리 사랑받는 존재가 된 것처럼 우리도 마음속 낯선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다른 빛깔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 공간은 내 안에 있던 그런 것들을 조용히 흔들어 주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전시장을 나와 판매부스를 둘러보았다. 메모지, 마스킹테이프, 만년필, 다이어리, 그리고 노트까지. 기록을 위한 도구들이 저마다의 디자인과 색감, 질감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노트는 내지의 종이 질감과 깊은 채도의 표지가 참 인상적이었다.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감과 부드러운 양장의 촉감이 고요한 집중을 부르는 듯했다.


누가의 기록소, 월간 '나'후기


마지막으로 들른 부스는 ‘누가의 기록소’였다. 이곳에서는 신문 형식의 흑백 종이에 한 달의 삶을 요약해 기록할 수 있는 용지를 판매하고 있었고, 매달 한 부씩 집으로 배송되는 구독형 서비스도 제공 중이었다. 몇 해 전에 아이패드로 다이어리를 작성하면서 아날로그 다이어리에서도 한 달의 기록을 한눈에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는데 마침내 그런 형식의 다이어리를 실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구성이 마음에 들었고 잡지처럼 정기배송 된다는 것도 좋아서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로 구독 결제를 마쳤다.


행사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낙담하며 이불속에서 하루를 그냥 흘려보냈을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좋아하는 것관심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고, 그 안에서 다양성을 관찰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실 마음 한편에는 ‘기록이란 결국 다 비슷비슷한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깊숙한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다이어리나 메모지에 감성적인 문장을 적어두는 그냥 그런 전시일 거라고 무심히 예측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녀온 전시는 그렇지 않았다.

사진과 글이 함께 엮인 앨범, ‘토마토’라는 평범한 사물 하나로 제작된 작은 테마 전시 등… 사람의 경험과 삶에 대한 태도, 가치관과 감각에 따라 ‘기록’이란 행위가 얼마나 다른 결을 가질 수 있는지, 그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들이 탄생될 수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감탄했다.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작은 오만이 오늘 조용히 무너졌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우는 자세로 다시금 마음을 고쳐 앉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페어는 그런 겸손의 자세가 우리를 얼마나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분명하고 고요하게 내게 일러주었다.


예전에 썼던 짧은 글을 페어에 남겨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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