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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이아빠 Aug 04. 2023

EP 08. 원망과 소주

[2013년 겨울]

소일거리를 찾겠다는 엄마의 강렬한 의지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소식지에 나와 있는 구인공고는 단 몇 줄이었지만 실제 근로자가 수행해야 할 일은 치매 초기인 엄마에겐 벅찬 영역이었다. 엄마도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는 모습이었는데 옆에서 보는 입장에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걸까? 엄마는 갑자기 이모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원거리에서 각자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세 자매들이었기에 여간해선 다 같이 모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을 알았는지 다들 어찌어찌 일정을 조정하여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서울에 도착하여 이모들과 자리를 잡은 곳은 한 횟집이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섬 출신인 세 사람에게는 횟집만 한 곳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이 입맛이 바뀌어 회맛을 꽤나 즐기게 된 내 입장에선 나쁠 건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에 동참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엄마는 사이다, 나머지는 소주 한 잔씩 기울이며 얘기를 나눈 지 한두 시간쯤 흘렀을까? 큰 이모가 나를 붙잡고 비밀스럽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실 몇 년 전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라는 말로 시작한 이모의 설명은 이랬다. 몇 년 전 자매들끼리 서울에서 모였는데 엄마의 말과 행동이 이상해서 근처 정신건강의학과를 갔었고, 당시 진료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또한 가족들에게 말하려 했으나 엄마가 진단결과를 가족에게 전달하면 이모들을 다시는 안 보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우울증에 대한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군대 시절 휴가를 나와 엄마와 단 둘이 횟집을 갔던, 엄마의 변화를 처음 감지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때가 첫 번째 기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괜히 앞에 앉아있는 이모가 원망스러웠다. 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냐며 따져 묻고 싶었으나 당신인들 동생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랬을까 싶어 비난의 말을 속으로 삼켜내기만 했다. 비밀유지를 강요한 엄마, 이에 동조한 이모들 모두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그렇게 혼자 사색에 빠져있던 순간 엄마가 자리로 돌아왔고 이모와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별다른 말없이 목구멍으로 원망과 소주를 함께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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