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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이아빠 Aug 04. 2023

EP 09. 다시 물 흐르는 소리

[2014년 봄]

엄마의 병과 이를 둘러싼 사실을 하나하나 파악해갈 때쯤 복학을 하게 되었다. 엄마를 집에 혼자 둔다는 사실이 불안했으나 내 삶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학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직은 엄마의 치매 진행 수준이 식사, 배변 등 일상을 어찌어찌 보낼 수는 있는 정도란 사실이었다. 나 또한 엄마를 돌보는 것과는 별개로 쉬는 동안 꾸준히 일을 이어가면서 복학을 준비했고 학교 근처에 작은 방을 얻을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엄마라는 고민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준비할 수 있었다.


[2015년 여름]

물 흐르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엄마, 또 시작이야?"라는 외침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개수대에서 쉼 없이 손을 닦고 있는 엄마를 밀쳐내 보지만 역시 순순히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대학교 졸업 전 마지막 학기, 난 집으로 돌아왔다. 최근 몇 년처럼 원거리에서 살면서 엄마의 진료를 도울 수도 있었으나 이제 스스로 식사조차 챙기지 못하는 엄마를 두고 타지에서 거주하는 선택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또한 학교를 핑계로 몇 년간 집을 벗어나 있었으니 나머지 가족들도 알게 모르게 나의 복귀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다시 아침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엄마와의 일상이 작되었다.


아침 기상이야 엄마의 물소리 덕에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식사가 항상 고민거리였다. 직접 요리하는 건 어렵지만 차려둔 걸 먹을 수 있는 엄마였기에 뭐라도 해놓고 집을 나서야 했다. 한동안 자취를 했다지만 20대 중반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음식은 요리라기 보단 요리를 흉내 낸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본인의 의사표현에 어려움을 겪은 탓인지 모르지만  마는 고맙게도 자취생 수준의 음식을 곧 잘 비웠다.


사실 문제는 엄마보단 내 일상이었다. 마지막 학기에는 엄마를 돌보며 통학하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으나 멀미를 달고 사는 나에게 왕복 세 시간이 넘는 버스 이동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약은 기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이 또한 효능이 없었기에 버스 맨 앞 좌석에 앉는 게 유일한 멀미 대응책이었다. 이 때문에 바로 옆에서 운전하는 버스기사들이 나를 수시로 말동무로 삼았는데 어린 맘에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으나 속으론 욕설을 뱉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관심이 싫었다.


하루는 얼굴이 벌겋고 알코올 냄새가 나는 버스기사를 마주했는데 아빠의 생년월일을 묻더니 "네 아빠가 58년 개띠야? 개새끼는 왈왈 짖고 다니는데? 네 아빠도 개새끼처럼 뛰어다니겠네?"라는 소리를 시작으로 나에게 농담인지 욕설인지 모를 것을 쏟아냈다. 한동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버스기사의 살풀이에 장단을 맞춰줬지만 상황이 지속되자 내 표정엔 불쾌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버스기사는 달라진 공기를 느꼈는지 "왜? 기분 나빠?"와 같이 이전과 다른 표현을 쓰기도 했으나 그도 잠깐뿐, 1시간여의 남은 여정동안 나는 이유도 모른 체 그의 감정 해우소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봤다. 전역 후 엄마의 치료를 주장한 순간부터 얼마 전 통학을 선언한 순간까지 나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감당했던 시간들이었다. 다시 엄마와의 일상이 시작된 지금 앞으로 마주할 선택과 뒤 따를 책임을 생각해 보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타는 속을 잠재우고자 창 밖을 바라봤는데 마주한 풍경은 내 맘같이 시꺼먼 암흑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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