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아이가 삶의 주인

by 라이프스타일러

사라진 초1, 분명 끝날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 서 있겠다고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막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교실로 가 보니 거기에도 없었다. 막내의 신발 주머니만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라진 막내는 로봇 과학 교실에 있었다. 엄마가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막내는 친구를 따라 로봇 과학 교실로 갔다. 신청하지 못한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끝날 시간애 맞춰 과학 교실로 갔다. 막내는 손짓하는 아빠를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다가왔다.


아빠: "승우야, 재미 있었어?"

승우: "...."

아빠:"로봇 과학이 하고 싶었어?"

승우: ".... 나는 명단에 없던데..."

아빠: "그래도 하고 싶어?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볼까?"

승우: "....."


막내는 본심을 가슴에만 품고 말을 하지 않았다. 안된다는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이제는 아이를 대신할 수가 없다. 결국 안되는 것에서는 포기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하고자 하는 것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아이도 삶을 스스로 겪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고 얻으며 살아가야 한다. 아이가 아이 삶의 주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면서 살아 가야 한다.”


막내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열리는 풍물시장에 간 적이 있다. 아이는 거칠 것 없는 대담함으로 날카로운 화살을 과감히 냅다 던졌다. 막내는 화살이 풍선을 맞추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막내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의 대부분은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엇을 해도 자신감 넘치는 역동성이 있다. 두려움 없는 행동은 막내를 향한 가족의 무한 신뢰와 사랑에서 나온다.


막내에게 가장 소망하는 것 하나를 빌라고 했다. 갖고 싶었던 후롯티 로봇을 뒤로 하고 "엄마가 몸살에서 빨리 낫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후롯티 로봇 앞에 엄마를 앞세울 수 있다는 것이 기특했다.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는 막내에게 어떤 소망을 빌어야 할까?


막내는 착하면서 고집이 세다. 어느 날 막내는 둘째 형의 배신으로 먹고 싶었던 짜장면을 못 먹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서러워지는 막내의 칭얼거리는 속상함이 그치지를 않았다. 결국은 아빠와 단둘이 외곽에 위치한 짜장면 전문점을 향했다. 영업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주문을 했다. 밤 9시에 짜장면을 받아 들었다. 막내는 홀로 받아 든 짜장면을 보면서 얼굴에는 흡족한 만족감이 가득 흘렀다. 큰 그릇의 짜장면을 혼자서 다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저녁을 먹은 아빠가 대신 먹어 주기도 어려웠다. 너무 많이 먹는 듯하여 물 먹이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런 일을 우리 막내는 후일에 기억할까 모르겠다.


어떻게 해도 휘둘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아이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잘못된 양육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막상 부모가 되고 보면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어떻게 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아이의 나이를 따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인생을 다시 반복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도 아이를 키우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뭘 해줘도 부족할 것만 같은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 사랑스러움 그대로 지금 이 시간이 멈춰 있길 바란다. 아이들이 온전히 서는 날 우리 곁은 허전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그렇게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 속에 태어나고 뒤엉킨 감정의 굴레를 지나 성인으로 성장해 나가는 길목을 부모는 지키고 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초등학교로 막내를 바래다주게 되었다. 아빠는 우산을 들고 나왔다. 당연히 막내도 자기 우산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너무 좋아하면서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혼자 잡고, 혼자 펴고, 혼자 쓰고, 혼자 접고 모든 걸 혼자 하고 싶어 한다. 아빠도 알고 있다. 아이는 독립하려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대할 때 고착화되어 있는 감정이 있다. 아이를 당연히 돌봐 주어야 한다는 감정이 그것이다. 아이가 홀로 서려 하니 아빠는 섭섭함에 흔들리기도 한다.


아이가 혼자 하게 해야 한다. 점차로 아이의 비중에서 아빠가 빠져나가야 한다. 아이가 독립해서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정으로 막내는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바래다줘도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은 아빠만의 것이어야 한다. 아이는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빠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와 아빠는 다른 인격체다. 아이와 발을 대어 보니 서로 발가락이 닮았다. 닮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마음은 닮은 면보다 닮지 않은 면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께 있어도 아이와 아빠는 서로 다른 별개의 사람이다. 아빠를 닮아 가는 것이 기쁘기는 하지만 결국 막내는 자신의 삶을 닮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뾰족 튀어나온

닭의 부리가 너무 매서워


아빠 등뒤에

바짝 엎드려 숨죽이다가


암탉이 품던

온기가 스며 있는 달걀을


주울까 말까

눈치만 망설여 지는데


귀여운 병아리 품는 욕심에

살그머니 주어 드는 작은 손


병아리도 엄마가 없으면

태어난 걸 슬퍼할지도 몰라


미끈 부드러움만 느껴 보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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