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마음학 특강, 종이컵
두꺼운 종이 박스에 둘러 쌓인 나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객은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립니다.
알 수 없는 상품을 샀다가 일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나는 내 몸 한 모퉁이를 과감하게 잘라냈습니다.
기꺼이 속을 보여줌으로써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속을 보이고 나면
다음부터는 굳이 속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됐든 처음의 관계 맺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처음인 고객에게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것을 터득했고
그 대가로 고객의 사랑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신뢰는 중요하다. 상품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품이 사람에 의해 악용되는 경우가 생긴다. 기대했던 믿음에 상처가 나고 신뢰가 훼손된다. 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어렵다. 고객에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기기 때문이다. 신뢰가 돈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신용사회로 갈수록 신뢰로 인한 경제적 가치는 높아진다.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건 화폐로 환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경제활동의 주체가 서로 믿으면 그만큼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 신뢰는 경제적 활동에 수반되는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을 높여 주는 기반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매장 한쪽에 노브랜드 코너가 꾸며져 있을 때다. 종이컵 박스 상품이 새로 입점됐다. 박스로 된 종이컵 상품은 매우 저렴했지만 판매가 부진했다. 보이지 않는 박스 안에 어떤 종이컵이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매자 입장에서 구매 실패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저렴하게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종이컵의 원료인 펄프를 줄여서 만는 종이컵도 있다. 재료량이 줄어 들면 종이컵의 인장강도가 약해진다. 장력이 약해진 종이컵에 물을 담으면 지탱하지 못하고 형태가 일그러진다. 뜨거운 물을 담으면 더 빨리 무너진다. 합리적으로 원가를 줄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절감은 품질만 떨어뜨릴 뿐 소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객에게 그런 경험이 있다면 망설임은 당연한 일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냥 가거나 큰 결심을 하고 나서 구매했다. 쓰고 버릴 일회용 종이컵을 사는데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신상품으로 인해 고객은 고민과 스트레스에 빠진다. 합리적으로 의사결정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박스 하나를 뜯어서 속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샘플이라고 쓴 네임 카드를 붙여 놓았다. 고객은 더 이상 망설이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구매 속도는 빨라졌고 많은 수량이 판매되었다.
그 뒤로 제품 겉박스에 칼선을 넣어 구멍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스틱형 믹스 커피를 꺼내서 먹을 수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 고객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판매자는 소비하는 주체가 아니다. 당연히 고객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종이컵 박스 상품에서 주는 교훈은 신뢰다. 상품과 고객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자 매출이 증가했다. 샘플을 보여 주기 이전과 이후의 매출 금액의 차이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종이컵 박스 상품은 신뢰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좋은 사례를 보여 준 셈이다.
고객은 늘 다니던 대형마트라 하더라도 낯선 상품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보인다. 처음 대하는 상품에 신뢰를 보이기 어렵다. 선도적인 고객이나 호기심 많은 고객은 예외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 상품 구매에 대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고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정보다. 판매처에서도 신상품이 출시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고객이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객이 체험하고 나면 확신이 생기고 상품 구매로 이어진다.
고가의 상품 또한 마찬가지다. 애플에서 아이폰이 출시되면 스티브 잡스가 직접 프리젠테이션했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 고객과 진정성 있게 접근한다. 고객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한다. 이러한 CEO의 커뮤니케이션은 고객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CEO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다 보니 상품에 대한 신뢰는 급격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
상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나면 소비자의 아량은 넓어진다. 상품에 하자가 발생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회사가 고객을 속이지 않는다는 신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신뢰는 그만큼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상품과 고객이 밀착될수록 신뢰는 강하게 형성된다. 상품마음학에서는 상품과 고객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의 필요를 충족해 주는 상품의 기능은 고객의 욕구와 일체가 됨으로써 가치를 발현한다.
예전에 의류를 살 때는 매장에 나가서 입어 보고 구매를 했다. 옷의 질감, 패턴, 컬러, 싸이즈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의 니즈와 일치하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표준체형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의류의 싸이즈 일치 여부가 가장 까탈스럽다. 같은 치수로 생산되는 의류라 하더라도 의류회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실제 착용해 보면 핏이 다른 경우가 흔하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구매를 해도 매장에서 구매한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체형 측정 기법도 발달되었지만 반품이 보장되고 있어 안심하고 구매를 할 수 있다. 기술의 발달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더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구매 고객의 니즈에 맞지 않으면 일정 기간 안에 언제든 교환 환불이 가능하다. 의류와 고객을 연결해 주는 신뢰의 관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고객은 따로 시간을 내서 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판매자는 전국의 고객을 대상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신뢰가 형성되면 그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 이해관계자에게 공평하게 배분된다. 경제활동의 활성화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한다.
식품은 고객이 이미 알고 있는데도 꾸준하게 시식을 제공하는 대상이다. 제철 과일이 그렇고 호주산 소고기가 그렇고 판매촉진에 목적을 둔 행사 상품이 그렇다. 고객이 알고 있는 상품이라도 시식은 구매를 충동질한다. 맛을 보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이 되살아난다. 경험은 신뢰를 강화하고 강화된 신뢰는 구매를 촉진한다. 신상품도 맛을 보고 욕구를 느끼게 되면 구매로 이어진다. 새로운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 종이컵 박스 상품도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봄으로써 새로운 신뢰가 형성되었다. 신뢰가 형성되면 구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된다.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분야도 있다. 재포장해서 판매가 가능한 상품이다. 정부 당국의 강력한 의지로 재포장 상품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축산물은 숙성 과정이 진행되므로 진열된 일자에 따라 할인판매가 가능하다. 신선 식품 중에서 관리가 양호한 편이다. 수산물의 경우에는 부패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설정된 유통기한 보다 실물의 상태를 유관으로 확인하는 관리가 필요하다.
채소나 과일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선도를 구분하기 어렵다. 선도 유지 기술이 발달하고 콜드체인 시스템 도입으로 판매 기간이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신선 식품의 품질을 관리하는 일은 정교한 노력이 필요하다.
상품 중에서도 신선 식품에 대한 불만은 끊이지 않는다. 신선 식품은 자연상태에서 재배, 채취, 수확, 어획, 사육되는 특성이 있다. 고유한 특성이 유지된 채 공급되다 보니 일정한 품질관리가 어렵다. 수확 후 품질관리나 사후적 품질관리 노력을 통해 평균적인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1차 생산물이다 보니 운송, 보관, 판매, 이용에 있어 차이가 발생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신선 상품을 판매하고 관리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객이 언제 내점 하던 고객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필요한 만큼 제공해야 한다. 고객을 위해 준비했지만 팔리지 않는 상품도 있다. 팔리지 않는 신선 상품은 폐기해야 한다. 고객이 구매할 상품의 수량과 매장에 진열한 상품의 수량은 일치할 수가 없다. 상품은 항상 모자라거나 남거나 둘 중의 하나다. 모자라면 고객의 불만이 커지고 남으면 폐기해야 한다. 폐기는 수익률에 타격을 준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덕분에 문제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매장에서는 시간대별로 상품의 진열량을 조절하고 남는 것은 폐기했다. 통계를 통해 평균 수량을 구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제공하면서도 폐기량을 최소화했다. 고객의 클레임도 그만큼 줄어 들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고객의 불편과 컴플레인은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신뢰라는 것이 강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
경제활동의 주체가 서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면 신뢰를 손상시키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자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시장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공급자의 능력도 천차만별이고 고객마다 욕구가 다르다. 상품의 품질과 가격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인위적으로 통제하거나 선의의 의지에 맡겨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경제활동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가치는 효과와 효율이기 때문에 인문학적 요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고 자율적으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뢰다. 신뢰 관계의 회복과 구축을 통해 상품과 고객은 함께 즐겁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상품에 누명을 씌우고 시련을 겪게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상품은 이용하고 버리는 대상이 아니다. 삶을 유지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일체적 관계임을 잊으면 안된다. 상품마음학을 통해 상품을 알게 되면 고객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