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피로가 바위처럼 누른다. 낡아 빠진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몸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7층으로 올라 오는 표시가 보였다.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 때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는 신호로 바뀌었다. 맞은 편 엘리베이터를 눌렀는데 내려가던 아까의 엘리베이터가 7층으로 올라왔다. 이랬다 저랬다 제 마음 대로다. 4대의 엘리베이터는 최적 경로를 선택해 효율적으로 움직인다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다행으로 여기고 탔는데 계속 내려 간다. 5층을 안 눌렀다. 1층까지 갔다가 다시 5층으로 올라왔다. 주어진 행운을 관리하지 못하면 아낄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소모하게 된다. 주어진 환경보다는 환경을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상품 진열에도 최적화된 효율의 원칙이 적용된다. 정성스런 진열이 아닌 회전력을 높이는 진열이다. 작업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작업 내용이 이루어진다. 필요 이상의 정성은 에너지만 낭비하는 쓸모 없는 일이 된다. 일은 열심히 하기보다는 잘해야 한다. 정해진 범위 내에서 정해진 일만 하면 된다. 더 배우고 싶다면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야 한다. 실수할수록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짧은 시간에 능력이 축적되는 건 모두 실수 덕분이다.
실수와 효율은 작업성과라는 스펙트럼의 양끝에 있다. 실수는 학습을 위한 방법이다. 실수했다고 열 받으면 몸도 알아챈다. 부정의 인식은 일을 스트레스로 전환시킨다. 근육을 경직시키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 스트레스는 쌓일수록 해롭다. 신체가 정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멈추게 하고 특정한 일에 에너지를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정근이가 실수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정근이는 학생인 듯 아닌 듯 나이가 애매하지만 물어 보지 않았다. 젊어서 그런지 잘 버틴다. 일에 익숙해져 있다. 무뚝뚝하고 성실하고 곁눈질 하지 않아 친해질 수 없다. 함께 일하다 보면 쉬러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왜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남성은 대화가 아닌 일을 통해 관계가 형성된다. 엇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손발이 맞으면 급 친해진다.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게 된다. 능력자는 경쟁자다.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도 높은 일을 당연한 일로 받아 들이게 한다.
입고 파트의 상품 분류는 배송 차량의 상품 하역에서 시작된다. 배송 차량이 도착하면 전동 자키로 상품이 실려 있는 팔레트를 내린다. 팔레트 위에 가득 쌓인 상품을 정해진 유형별로 분류한다. 이동 캐리어인 L카에 실어 운반한다. 이동된 상품은 헬퍼가 구역별로 가져가 진열한다. 작업 할당량에 맞춰 인력을 배정한다. 작업 내용에 따라 사용하는 근육이 달라진다. 간혹 고객의 주문량이 폭주하면 출고 파트로 지원을 가서 상품을 집품(Picking)하기도 한다. 집품의 빠르기가 효율을 결정짓는다.
집품에서 절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운동은 빠르게 걷기다. 한 공간에서 진열과 집품이 동시에 이루어지므로 사람의 동선과 상품의 동선이 빈번하게 교차한다. 진열된 상품도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 상태가 항상 변한다. 아침에 진열해 놓아도 오후 들어서면 다른 상품으로 교체되어 있다. 이곳의 최대 덕목은 회전하는 효율이다.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다. 작업 환경에 적응하려면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알아서 터득해야 한다. 배려가 끼어들 틈이 없다. 시스템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건 손실과 비효율을 초래한다.
오후에는 5시간 동안 쉬지 못했다. 상품을 분류해 놓아야 진열이 가능한데 분류 인원이 2명뿐일 때 그렇다. 평균적으로 진열 인원 4명당 분류 인원 1명이 필요하다. 오늘은 5명이 필요했다. 분류된 상품이 없어 진열하던 손이 멈췄다. 진작 인력을 지원 했어야 했다. 둘이서 죽을 둥 살 둥 분류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도 손을 놓지 못하고 매달렸다. 어쩌면 작업 흐름을 끊기 어려워서, 어쩌면 자릴 비운다고 눈치 보일까 봐, 어쩌면 홀로 남게 되는 동료에게 미안해서,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뭐가 됐든 일용직이 감당할 일은 아니다. 결국 모두가 달려들고 나서야 정상화 됐다. 일용직이 볼 때는 비효율이지만 관리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효율이 될 수도 있다.
휴식을 취하고 오면 인력이 지원되어 있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유는 자신에게 있다. 하루 일하고 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상황에 대한 핑계를 만들기 전에 상황을 이겨내고 싶다. 나는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관리자에 대한 섭섭함은 애초에 없다. 그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도 없다. 오히려 친절하다. 가까운 곳을 놔두고 50분이나 걸리는 이곳을 선택한 이유도 관리자가 주는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다. 작업 상황의 늦은 대응도 전체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이 없다. 작업 속도로 봐서 오늘 목표량도 가뿐히 채울 것이다.
사람에 대해 화가 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어떻게 일을 시켜도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관리 범위 내에 있다. 처음부터 일용직이 책임질 일은 없었다. 감정을 빼면 감정을 다치지 않는다. 감정을 다치지 않으면 일의 맥락이 선명하게 보인다. 감정도 효율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이토록 쉬운 관계 관리가 스트레스가 될 일은 없다. 책임지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오늘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어제의 상품이 아니듯 오늘 일하는 동료가 내일의 동료라는 보장도 없다. 친해지지 않는 명확한 이유다. 다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매일이 일용직이기 때문에 일용직은 매번 바뀐다. 어차피 바뀔 사람과 굳이 친해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필요에 따라 늘고 주는 인력의 효율성이 최고다. 사람에 관심이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사람도 있다. 5개월만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영진이는 직업 훈련 뒤 안정된 일을 하게 됐다고 좋아했었다. 다시 나온걸 보면 재취업이 쉽지 않았나 보다. 안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막상 보니 반갑다는 마음이 뒤섞였다. 다중적 감정이 동시에 고개를 내민다.
영진이는 이곳 저곳이 아프다며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오래 쉬었으니 다시 적응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거다. 상관없다. 대신 좀 더 일하면 된다. 각자 숨만큼 일하는 게 좋다. 하루의 일이 매일 마감된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은 오늘로 끝난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어제의 일이 누적 되어 나타나진 않는다. 오늘 일이 끝나면 새로운 내일은 내일의 일을 하면 된다.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옳으면 틀린 사람도 존재해야 하므로 옳고 그름은 관계를 경직시키고 갈등을 일으킨다. 감정을 내려 놓고 근육 만들기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근육이 성장하면 마음의 크기도 성장한다. 강인한 근육이 넓은 아량을 이끌어 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넓은 아량을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 스승은 많을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