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착기
독일에서 혼자 살게 된 이후 나는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독일에서 한국인은 쉥겐 조약에 따라 90일 동안 무비자로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쉥겐 조약이라는 것이 전 유럽연합을 통틀어 90일 동안 무비자로 지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나는 이미 4월부터 유럽연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연구계획서를 쓰고 교수님들께 연락하는 일을 독일에 와서 했고, 5월에는 베니스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7월이 되면 당장에 90일의 무비자 체류 가능 시간을 전부 소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늦어도 7월 초에는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 했다. 독일에서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거주자 등록이 되어있는 정해진 거주지와 독일 은행계좌, 독일 건강보험, 독일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서류 등이 필요했다. 여기에서 엄청난 딜레마가 생긴다. 이 모든 서류들이 다른 서류를 물고 무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건강보험에 가입하려면 독일에 거주하여야 하는 이유와 독일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그리고 은행은 거주자 등록이 되어있는 거주지가 있을 때에만 계좌를 열어준다. 그래서 거주자 등록을 하려면 집이 있어야 하는데, 집주인은 비자가 있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어있는 사람에게 집을 빌려주고 싶어 한다. 맙소사.
일단 외국인인 나는 거주지를 구하는 일부터가 문제였다. 한국만 주택 대란인가? 절대로 아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유로를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월세가 너무나 비쌌다. 싼 가격으로 기숙사의 도미토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도미토리 대기자 명단은 줄이 길었다. 또한 이미 한 번 학생기숙사에서 살아 본 나는 이제 더 이상 날마다 파티를 하는 WG형 도미토리*에 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더구나 독일에도 월세사기(?)가 흔했다. 그러니 안전하려면 부동산을 통해서 집을 구하면 되겠지만 복비가 보증금 이상이었다. 방법은 하나다. 직접 발로 열심히 뛰는 수밖에.
변변찮은 내 독일어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메일을 하나 작성했다. 내가 새롭게 박사 연구를 시작한 학생이며 조용한 사람이고 월세를 내는 데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어필을 하는 메일이었다. 내 예산에 맞는 집은 학생처 홈페이지나 [ImmoScout24]라는 앱을 통해 알아보았다. 거기서 집을 고르고 나면 집주인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종종 신문의 '세입자 구함' 코너를 살펴보기도 했다.
매물은 적었다. 학기 중인 데에다가 내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고르려니 더 힘들었다. 그래도 메일을 10개 정도 돌렸는데 8 집 정도에서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집을 보러 간다고 당장 계약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집주인은 나를 비롯해서 세입자 후보 여럿과 동시에 약속을 잡았다. 집주인이 모든 세입자 후보자를 만난 뒤에 마음에 드는 세입자에게 연락을 주면 그 후에 계약을 할 수 있는 게 독일의 집 구하기 프로세스다.
내가 B1의 독일어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전 독일어와 책으로 배운 독일어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활짝 웃는 얼굴과 쾌활함으로 내 부족한 독일어를 커버하기 위해 애썼다. 더구나 내가 약 3주일 동안 빌렸던 에어비앤비의 주인이 더 이상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비자 만료 열흘 앞두고 당장에 다른 임시 거주지를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기적이 일어났다.
내 첫 번째 독일 월세방이 생겼다.
자. 어렵게 집을 구했으니 뭘 해야 하느냐? 서류와 싸워야 한다. 독일은 전부 서류와의 싸움이다. 모든 '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서류와 서류와 서류로 만들어진다.
집을 계약할 때에도 집주인과 계약서를 쓴다.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는 너무 어려워서 한 번도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는데, 계약할 때에 집주인이 대부분을 설명해 주니까 그대로만 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입주할 때와 나갈 때에 집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고, 훼손한 부분이나 변경한 부분은 반드시 복원해 놓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입주하자마자 집 컨디션을 세세하게 사진 찍어 두는 것이 좋다.)
다음은 거주자 등록Anmeldung을 해야 한다. 편지를 써서 예약을 할 수도 있고, 직접 동사무소에 방문하여 예약을 해도 된다. 동사무소가 거의 집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직접 방문하여 거주자 등록을 했다. 거주자 등록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신청서는 동사무소에서 베포 한다. 집 계약서와 여권, 신청서를 내면 직원이 확인하고 거주자 등록증을 서류로 준다.
그 후 계좌를 만든다. 계좌를 만들고 싶으면? 은행에 방문해서 예약을 한다. 내가 계좌를 열고 싶다고 하면, 은행에서 내 담당자를 배정하겠다며 약속을 해 준다. 그 후 담당자가 연락을 주는데, 그럼 나는 담당자와 예약을 잡는다. 그러면 예약된 날짜에 내 담당자를 만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은행에서는 정말 감당 안되게 많은 서류를 준다. 다 잘 챙겨둔다. (그리고 2022년, 이제 독일에도 비대면 계좌 개설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다음 기회에...!)
보험의 경우는 인터넷을 이용했다. 나는 박사과정 학생이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신분이 애매하다. 학생인데 학생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일반 공보험에 가입하면 가입비가 너무나 비싸다. 나는 5년 동안 가입할 수 있는 사보험***에 가입했다.
이쯤 되었을 때에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 즉 쭐라숭Zulassungsbescheid이 나왔다. 이 모든 서류에 내 사진, 여권 등을 모두 챙겨서 드디어 외국인청에 갔다. 그날은 다행히도 방문자가 많지 않아서 곧장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서류와의 싸움은 내가 독일에 와서 지도교수님을 만난 후 정확하게 한 달 만에 해결되었다.
Tip
1. 집주인을 만나러 갈 때의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 집주인이 세입자를 판단하는 첫 번째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깔끔하게 입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말을 할 때에도 내가 방금 독일에 도착해서 독일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려고 (...) 노력했다.
2. 내가 집을 고를 때 예산을 제외하고 본 것은 첫째, 집주인이 나이가 좀 많을 것, 둘째, 함께 사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나이가 좀 많을 것이었다. 첫 번째 집을 고를 때에도 그렇고 지금 살고 있는 두 번째 집을 고를 때에는 집주인의 나이만 봤다. (처음에는 도무지 집이 구해지지 않아 급한 대로 집주인 부부와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갔었다. 아무 불편 없이 오히려 아주 잘 지냈지만, 결국 혼자 살고 싶어서 2년 반 만에 혼자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구해 나왔다.)
3. 박사 연구생이 비자를 받기 위해 외국인청에 갈 때 가져갈 서류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거주자 등록(Anmeldung) 증명서
은행 계좌와 계좌 안에 충분한 돈 : 재정 보증을 요구하기도 하고 Sparekonto라는 특별한 계좌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슈투트가르트의 경우에는 한 달 최소 체류 비용을 840유로(2022년 현재)로 계산하여 석 달치 이상의 돈이 들어있으면 비자가 나온다.
학교의 입학 허가서(Zulassungsbescheid)
건강보험 증명서(Krankenversicherungsbescheid)
여권
여권 사진 하나
비자 신청서 : 신청서는 외국인청에 비치되어있다. 예약을 할 경우에는 서류를 집으로 보내 주거나 외국인청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4. 이렇게 받은 서류들은 웬만하면 하나도 빼놓지 말고 챙겨두자. 언제 어떻게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 나중에 거주지를 옮길 때에도 이런 서류들이 모두 도움이 된다.
* WG형 도미토리 : 독일식 플렛 셰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용 공간을 같이 쓰고 각자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사는 형태이다. 당연히 집을 함께 쓰는 룰이 있고, 룸메들과 잘 맞지 않으면.... 상상하기 싫다. 특히 기숙사라면 마음대로 방 빼는 일도 어렵다.
** 독일에서 박사과정 연구자의 신분 : 박사과정 학생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생이면서 학생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경우에 따라 연구비를 받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박사 비자로는 학생처럼 매달 450유로 이하의 돈을 받으며 하프타임 잡을 가질 수 있고, 경우에 따라 학생이 아닌 직장인인 것처럼 학생들이 받는 저렴한 할인(?) 혜택을 못 받을 수도 있다.
*** 사보험(건강보험) : 일종의 여행자 보험인데, 사보험으로도 비자를 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여행자 보험은 5년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 첫 사보험은 마비스타MAWISTA 였고, 지금은 케어컨셉CareConcept을 쓰고 있다.
**** 외국인청에 사람이 많으면 : 외국인청에서 비자 신청서만 받고, 입구에 쓰여있는 담당 부서에 메일을 보내 예약을 잡은 뒤 약속된 날짜에 비자를 받으러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