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집을 사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안 되었다. 아파트 청약을 수십 번하고 웃돈을 주고서라도 분양권을 사려고 했지만, 인연이 없었는지 성사되지 않았다. 기존의 아파트를 사려고 해도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맘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았다. 아내가 사자고 하면 내가 싫고 내가 사자고 하면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 사람들의 무용담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남들은 어떻게 청약이 잘되는지 몇 번의 이사로 수억 원을 챙겨 자산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움과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뭐 했나?’라고 하는 자괴감과 이재에 밝지 못하면서 어둡잖은 경제 지식을 내세우다 우물쭈물한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5년 전 집을 사려고 여러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그 당시 집값이 최근처럼 상승하기 전이었지만 그 이전에 비하면 집값이 많이 올라있었다. 당시에도 주택보급률과 인구 감소에 따라 집값 하락에 관한 주장과 1인 가구 등장 등 세대수 증가로, 주택 수요는 줄지 않아 가격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넉넉하지 않아서 너무 오른 집 가격에 선뜻 응할 의사가 없었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같은 모습이었다. 따지 못한 포도를 보고 맛이 실 것이라고 돌아서는 것처럼, 가격에 거품이 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마음속에는 머지않아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는 유트버의 주장에 확증 편향적으로 동조하기도 했다.
부동산 중개사는 이런 내 모습이 답답했던지 자신의 사촌 동생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촌 동생에게 여러 번 집을 사라고 했지만, 나처럼 이것저것 따지면서 안 사고 있다가 결국 값이 오른 후에 집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분 말씀은 아무리 값이 오르고 내려도 실소유의 필요가 생겼을 때 집을 사는 것이 적기라는 것이었다.
순간 그분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동원해서 싼 가격, 적정한 가격으로 물건을 사는 것은 이상적인 방법이다. 얼마의 가격이 싸고 적정한 지는 주변의 시세, 내 주머니 사정과 관련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생각하는 가격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심리적으로 가격이 부담스러운 상태에서 향후 집값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었으니 복잡할 따름이었다. 그래서일까 단순하게 필요한 때 사는 게 정답일 수 있다는 말이 와닿았다.
’ 97년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큰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다. 환율 상승과 이자율 상승으로 부동산 경기는 최악이었다. 당시 부동산 시장은 끝났다는 말이 돌았다. 부채로 인한 기업들의 줄도산과 은행의 퇴출은 대출을 일으켜야 살 수 있는 부동산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집이 더 이상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며 미국처럼 사용의 개념으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집을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마침 벤처투자 붐이 일어났다.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은 창업 초기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스닥뿐만 아니라 장외 거래소에서도 비상장 주식이 거래되다 보니 투자 열기가 뜨거웠다.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IT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신생 IT 기업이 유수의 대기업보다 시가총액을 앞서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때 내가 아는 몇몇 분들은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겨갔고 그 차액으로 주식에 투자했었다.
문제는 그런 열기가 결국 거품으로 바뀌면서 주식에 투자했던 사람들의 손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가지고 있던 집을 팔아 주식에 투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팔았던 집값이 상승하면서 이중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호기롭게 경제전망과 기업 가치를 들먹이며 과감하게 투자를 했지만, 투자만 과감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투자했던 남자들은 집안에서 위신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부동산 투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뛰어나다고 한다. 여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와 육아, 살림하면서 얻는 경험이 남자의 신통치 않은 경제지식보다 낫다는 것이다. 집은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남편의 거시 경제 시각보다 아내가 생활 속에서 배우는 경제 흐름과 투자정보가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주부들의 부동산 투자가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부동산 소유자들은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해서 그렇게 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집을 사게 된 것도 아내의 역할이 크다. 재개발 예정 지역의 집을 매입해서 아파트 조합원 자격을 취득한 후 새 아파트로 이사한 것이다. 아내의 정보력이 큰 역할을 했다. 나 역시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 찬성을 했고 그 이후는 아내가 알아서 처리했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해서 집을 구하게 된 셈이다. 신혼 초 아내는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면서 은근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을 요구했었다. 그냥 웃으며 넘겼던 이야기였지만 결국 이렇게 떡이 나온 셈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워낙 집값이 상승한 시기에 집을 사서 향후 변동 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차피 살 집이라고 생각하며 가격 변동에 개의치 않으려 하지만 환경 변화에 깊은 통찰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97년 IMF 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 2019년 코로나 위기 등 경제위기의 주기가 짧아져서 앞으로 경제 환경이 또 어떻게 변할 것인지 관심을 두고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투자를 위해 많은 정보를 취득하고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결정을 하는 데는 많은 정보와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불필요한 정보와 기준을 과감히 버리고 의사결정에 필수적인 정보를 취득하고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아내와의 관계가 좋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현실 감각이 앞서는 여자의 판단이 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잘 들으면 또 떡이 떨어질 것 같은 기대감을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