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와 사람, 그리고 관계의 이야기

관계는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by 김성자예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관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서도의 관계론’을 접하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관계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글씨와 사람, 그리고 삶의 관계 말이다.



이야기는 신영복 선생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다. 선생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필법을 배웠고, 대나무 줄기를 묶어 만든 마당 빗자루 같은 붓으로 ‘죽필’을 쓰며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무기수로 20년형을 살며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 정향 선생에게 본격적으로 붓글씨를 배우게 된다.

백발의 노인, 정향 선생은 매주 감옥으로 찾아와 무려 5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붓글씨를 가르쳤다고 한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의 인생에서 감옥을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5년 동안 서도를 배웠던 것이다.

서도의 관계론, 흑과 백의 조화

서도의 관계론은 단순히 획과 자, 행과 연의 조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는 먹과 종이, 즉 흑과 백의 조화에 이르러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글씨를 잘 썼다 하더라도 큰 종이에 터무니없이 작게 쓰면 그것은 이미 균형을 잃은 글씨다. 반대로 종이가 작은데 과시하듯 크게만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검은 부분보다 오히려 하얀 여백이 얼마나 살아 있는가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먹의 부분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남아 있는 여백을 보며 전체의 균형을 읽는다. 한 획의 실수는 다음 획으로 만회하고, 한 글자의 부족함은 다음 글자가 기대어 보완한다. 그렇게 글자와 글자가 서로 기대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간다.

마지막으로 방서와 낙관, 두관까지 더해져 전체 균형에 참여한다. 실수와 사과, 도움과 감사가 어우러진 하나의 구조. 그 안에 산과 인생이 함께 담길 때, 그것을 ‘서도의 격조’라 부른다고 한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

그래서 말한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의 배움이고, 재능이고, 뜻이며, 결국은 그 사람 자체다. 글씨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환동,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기

서도에서 더 중요한 개념은 ‘환동’이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꾸밈이 없고 순수하다.

노자는 말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 최고의 기교는 오히려 졸렬해 보인다고.

진짜 기교는 인위적이지 않다. 자연스럽고 담백하다. 명필과 대가들의 글씨는 대체로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어리숙해 보이고 투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이와 진정성이 있고, 쉽게 질리지 않는 힘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에는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말쑥한 외모, 세련된 감각이 더 좋아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어딘가 서툴더라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 글씨 또한 그렇다. 자기 과시가 개입되는 순간, 격은 떨어진다. 인위는 곧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명필은 왜 오래 살아야 하는가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명문장은 요절해도 나오지만,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많이 겪는다는 뜻이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사물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쌓여야 비로소 글씨에도 무게가 생긴다. 삶이 쌓이지 않으면 글씨도 깊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50년 넘게 붓글씨를 써온 친구다.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묵묵히 붓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붓글씨 분야의 박사가 되었고, 조용히 장인의 자리에 올라섰다. 드러내지 않고 쌓아온 시간들이 결국 말을 해준다.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도 세련되고 말쑥하다. 하지만 그들이 쓴 글씨를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이 얼굴에서 왜 이런 글씨가 나올까 싶을 만큼, 사람과 글씨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된다.

오늘, 관계를 다시 배우다

오늘 아침, 서도의 관계론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관계를 배웠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글씨와 사람, 삶과 시간의 관계까지.


참 고마운 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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