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이 동네 이름이었구나.
뭔가 아주 긴 시간 동안 했을 때 마라톤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마라톤회의, 마라톤협상..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신문기사에서나 보던 마라톤이란 단어가 동네 이름인 줄은 그리스에 가기 전엔 몰랐다. 그 마라톤에 다녀왔다.
마라톤은 B.C. 490년 그리스가(정확하게는 아테네와 플라티아)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페르시아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그리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지켜낸 '마라톤 전투'의 현장이다. 약 2500년 전에 있었던 살육과 아비규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시골마을이었지만, 전투에서 희생된 그리스군 192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높이 10m의 커다란 무덤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날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기시켜 준다.
마라톤이란 동네는 전투 자체보다도 올림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42.195km 달리기로 더 유명하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이긴 후 피디피데스(Phidippides)라는 병사가 아테네까지 약 40km를 달려가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전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이 이야기가 fact가 아니라는 설이 다수라고 함). 그래도 사실이라 치고, 피디피데스를 기리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경기가 탄생했고 1896년 그리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 마라톤 경기도 이 출발선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동네 중심에는 소박하나마 Marathon Run Museum이 자리잡고 있어서 여기가 마라톤의 발생지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박물관 내부에는 마라톤의 역사와 매 올림픽 우승자 스토리가 전시되어 있었다(손기정과 황영조 사진도 있음). 역시 마라톤의 근본답게 올림픽 마라톤의 전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길 와보지 않은 자는 마라톤을 논하지 말라! ㅎ
출구 앞에 있는 작은 매장에선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마라톤 모습을 새겨놓은 장식품과 기념 메달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책갈피는 너무 아쉽다 못해 황당했다. 아니, 이게 뭐야. 마라톤의 근본이자 성지인 그리스 마라톤 박물관에서 산 거라는 표시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아무런 문구도 없다. 그냥 종이쪼가리 하나 끼워준다. 환장하는 줄 알았다. 책갈피 하단에 여백도 많구만, 여기에 그리스 마라톤 박물관이라고 새겨 놓으면 얼마나 뽀대날텐데 그걸 안하네. 나처럼 상업마인드가 없는 사람도 그 정도는 알겠다. 잠깐의 수고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안하네. 관광자원이 풍부하면 뭐하나, 써먹지를 못하는데.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호수는 절경 그 자체였다. 피디피데스 설화가 만일 사실이라면 그가 아테네로 뛰어올 때 쓰러질 정도로 숨은 바빴어도 경치 감상은 끝내줬겠다. 그럼 40km 뛸만 하지.
내가 마라톤을 다 와보다니. 출세했네, 출세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