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에서 살아남는 법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건물 안에서 보낸다.
회사, 카페, 지하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곳, 집.
집에 돌아오는 순간, 사람의 긴장은 눈에 띄게 풀린다.
슬리퍼를 끌고 다니고, 반쯤 누운 자세로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아, 이제 안전하다.”
하지만 생존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집은 ‘안전지대’라기보다는
“가장 오래 머무르지만, 가장 방심하는 공간”에 가깝다.
우리가 집을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강도가 없어서도, 지진이 안 나서도 아니고,
단지 “매일 밤 멀쩡히 자고 일어나봤기 때문”이다.
재난은 확률의 문제고,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운이 좋았다는 사실이
내일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집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아파트’를 떠올린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하주차장이 있고,
경비실과 CCTV가 있다.
관리비를 냈으니, 막연히 “뭔가 대책이 있겠지”라고 믿게 되는 구조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파트는 꽤 특이한 취약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수직 구조:
문제 생기면 한 번에 “위나 아래”로만 빠져야 한다.
옆으로 도망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엘리베이터 의존도:
고층일수록 계단은 ‘운동용’이지 ‘대피용’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지하 구조:
지하주차장은 편리하지만, 정전·침수·화재 시
위험 요소가 동시에 겹치는 공간이다.
단일 출입 동선:
대부분의 집은 현관문 하나에만 의존한다.
발코니, 창문, 비상계단은 ‘비상용’이라는 말 그대로
실제로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통로’다.
이 말은 곧,
“재난 시에 실제로 써본 동선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집 안을 수천 번 걸어 다녔지만, 정작 “살기 위해 움직이는 동선”은
단 한 번도 연습해 본 적이 없다.
생존주의자는 집을 볼 때도, 인테리어가 아니라 동선을 먼저 본다.
– 이 집에서 불이 난다면,
– 새벽 3시에 경보가 울린다면,
–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계단에 연기가 차오른다면,
– 강한 지진으로 엘리베이터와 계단 일부가 마비된다면,
나는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대부분 사람은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잠깐 멈칫하고, 곧이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좋지 뭐.”
생존주의자의 사고는 여기에서 한 번 더 들어간다.
“그래, 안 일어나면 좋지.
근데 일어났을 때의 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서부터
집은 ‘사의 공간’이 아니라 ‘전략의 공간’이 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생존 이야기를 하면
바로 가스버너, 정수필터, 비상식량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이전에 점검해야 할 것은 훨씬 더 단순하다.
1. 소화기
– 집에 소화기가 있는가?
– 단 한 번이라도, 안전핀을 뽑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위치를 눈 감고도 가리킬 수 있는가?
대부분의 집은 소화기를 “있을 법한 곳”에 둘 뿐,
“진짜 곧바로 쓸 수 있는 위치”에 두지는 않는다.
2.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는 동선
– 현관 앞 신발장은 꽉 차 있고,
신발은 현관 바닥 전체에 깔려 있고,
심지어 박스, 택배, 우산, 각종 잡동사니로 길목이 막혀 있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피해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연기가 차고, 눈이 따갑고,
아이를 안고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 모든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을까?
3. 비상등 / 라이트
– 정전될 경우, 집 안에서 즉시 켤 수 있는 라이트가 있는가?
– 휴대폰 라이트로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 어두운 집 안에서, 한 손은 짐 들고 한 손으로 아이를 잡고 있을 때,
어디에 라이트를 두는 게 가장 합리적일까?
이건 ‘장비빨’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밤중에 불을 끄고, 한 번 집안을 걸어보는가의 문제”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삶을 오래 살다 보면
계단은 “운동할 때 쓰는 보조 장치” 정도로 취급된다.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는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할 옵션이다.
– 화재 시에는 엘리베이터가 굴뚝이 된다.
– 지진 시에는 전력이 불안정해진다.
– 정전 시에는 ‘움직이는 관’ 그 자체다.
그래서 생존주의자는 이 질문부터 한다.
우리 집에서 “계단까지의 거리”를
단순 체감이 아니라 걸음 수로 알고 있는가?
계단으로 내려가 1층까지, 실제로 걸어본 적이 있는가?
비상계단 문이 평소에 잠겨 있지는 않은가?
(놀랍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 한 번 걸어보면,
생각보다 계단이 길게 느껴진다.
특히 고층이라면 10층만 내려가도 숨이 찬다.
이 경험 하나가,
‘아, 나는 비상 시에 물 한 병, 마스크 하나쯤은
현관 근처에 둬야겠구나’라는 감각으로 연결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생존주의자는 집에 두 가지 모드를 상정한다.
평시 모드 –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
전시 모드 – 재난 이후 며칠을 버티는 방식
전시 모드에서 집은
‘편히 쉬는 공간’이 아니라
‘최소 기능을 유지하며 버티는 요새’로 바뀐다.
그럼, 전시 모드의 집에 필요한 건 뭘까.
물:
– 최소 2L × 가족 수 × 3일치
– 생수 박스 1~2개를 베란다나 구석에 평소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체감 안정감이 크게 올라간다.
비상식량:
– 라면, 통조림, 즉석밥, 에너지바
– “이왕이면 안 먹고 버리더라도, 싸게 쟁여둘 수 있는 것들”
조명:
– 랜턴형 라이트 1~2개 (거실, 안방 기준)
– 건전지 여분
– 흔들어 켜는 화학 발광봉도 좋다.
정보 수신 수단:
– 소형 라디오
– 보조 배터리
– 각종 충전 케이블(C타입, 라이트닝)
위생:
– 물티슈, 휴지, 쓰레기봉투, 소독티슈
– 간이 화장용 봉투 (하수도/변기 사용 불가 가정)
이런 것들이 집 안에 조금씩 모여 있으면,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잠시 고립되어도 버틸 수 있는 공간”으로 성격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종종
집에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집은
– 가스가 지나가고
– 수도가 지나가고
– 전기가 지나가고
– 하수관이 연결된
거대한 시스템의 한 조각일 뿐이다.
즉, 집은 독립적인 요새가 아니다.
도시 인프라에 깊이 연결된, 어쩌면 가장 종속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도시형 생존주의자는
이런 질문도 함께 던진다.
집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들고 나갈 것인가?
5분 안에 챙길 수 있는 것과
30초 안에 챙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정말로 시간이 없다면,
나는 맨손으로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챙겨야지” 하다가 타이밍을 놓칠 사람인가?
가끔은 생존이
“무엇을 더 챙기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고 나가는가”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 집은
단순히 “쉬는 곳”이다.
하지만 생존주의자의 눈에 집은 이렇게 보인다.
– 비상구까지의 거리
– 현관을 막고 있는 장애물
– 손에 쥘 수 있는 도구의 위치(라이트, 라이터, 칼)
– 물과 식량의 비축량
– 가족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혼자 일어나 움직여야 할 경로와 순서
이건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집이 정말로 나를 지켜줄 수 있도록
집을 한 번 더 점검해보는 일.”
우리가 매일 밤, 아무렇지 않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건
아파트 구조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운이 지금까지 우리 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운에만 기대고 살 것인가.
언제쯤은, 운이 좋지 않은 날을 한 번쯤 상상해볼 것인가.
생존주의자의 집은
겉으로 보면 남들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서랍 안, 베란다 구석, 신발장 한 켠에는
작은 계획과 준비가 조용히 숨어 있다.
그리고 재난은,
그 작은 차이를 정확히 알아본다.
누가 준비되어 있었고,
누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