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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루쓰 Oct 20. 2024

8화. 그래 보이는 것과 그렇다는 것

소설 <식구의 탄생>

<같이 스터디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런 불친절한 톡을 봤나. 철훈의 얼굴이 금새 시무룩해졌다. 오늘은 지연씨와 만날 수 없단거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연의 톡에는 시일에 대한 정보가 빠져있었다. 오늘만 못하겠다는 건지, 내일도, 그 다음날도, 아니면 영영 못하겠다는 건지. 철훈은 지연과 스터디를 하던 카페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자신을 상상했다. 안된다, 나에게는 여전히 데미안이 필요하다. 지연은 좀처럼 화락맨션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철훈은 화락맨션 어딘가에서 또 불안감에 휩싸여 손톱을 뜯고 있을 지연에게 찾아가 따지기로 한 것이다.     


그 시각 지연은 201호 문 앞에 놓인 작은 제단 위에 국화꽃 한송이를 올리는 중이었다. 오늘은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종한의 49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제단에는 종한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가 적힌 포스트잇도 보였다.


<거기서는 완생이길> 

<그래도 서른까지만 살아보지 그랬어요>

<명복을 빕니다ㅠ>     


지연은 한없이 젊은 종한의 영정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연은 쪽지를 적었다.    

 

<당신이 부러워요>     


지연은 세 번째 시도한 논문 프로포절을 또 통과하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지연의 초고가 학술논문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고 못을 박았다. 오늘 오후 그 결과를 듣고서 지연은 익숙하게 애써 써 놓은 본문의 내용을 전부 지웠다. 다시 목차를 바꾸었고, 다른 참고문헌을 찾았다. 이상을 꼭 모더니즘 작가로만 분류해야 할까? 이상이 생전 남긴 13편의 소설이 충분히 분석된 건 맞나? 일상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언급하지 않았나? 답이 나오지 않아 버럭 화를 내듯 머리를 벽에 찧었다. 내 글과 나는 숙명적인 절름발이다. 우린 서로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다.    

  

그렇다면 포기하면 될 것을 나는 왜 포기하지 못하나.     


자해를 참는 것도 또 다른 스트레스였다. 자꾸만 손이 입으로 갔고 손등을 긁었다.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지연은 또 <날개>를 읽었다. <날개>의 그 남자는 옥상에서 뛰어내렸을까. 그 남자는 날개도 아직 돋지 못한 지연에게 자꾸만 날자고 했다. 그렇게 벼락처럼 떨어지는 아내의 모가지. 그리고 추락하는 글이 머릿속에서 부유한다. 삶에 대한 미련보다 글에 대한 미련이 더 컸다. 

그래서 지연은 홀린 듯 옥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며 철훈과 정민을 처음 봤던 그 날을 떠올렸다. 폐를 못살게 굴어 죽으려고 했던 나. 아무리 봐도 그때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옥상 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닿자 두 뺨이 얼얼하게 당겼다.     


지연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까마득한 밤이었다. 사방이 어두워 높이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연은 허공에다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을 바라보니 셰프의 밥이 떠올랐다. 그 정성들인 밥이 속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하는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더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처럼 부추기는 건 싫었다. 셰프의 식단으로 느꼈던 행복은 언제나 반쪽짜리였다. 그래, 어디 완벽한 행복이 존재하긴 할까.    

 

- 김지연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소리에 지연이 놀라 뒤를 돌았다. 철훈이었다. 201호 앞의 제단에서 지연의 포스트잇을 발견한 것이었다. 철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지연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 김지연씨! 정신 차려요!     


지연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멀찍이서 철훈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지연을 쳐다봤다. 지연은 지금 이 난간을 내려갔을 때, 또 다시 김지연이 될 게 두려웠다. 또 바보처럼 공부를 포기하지 못할 거고, 그로 인해 매일을 고뇌해야 할 것이고, 다시 좌절을 맛볼 것이고, 짊어질 수 없는 무게의 일상을 등에 업으려 아등바등할게 뻔했다. 지연은 체념한 듯 말했다.


- <날개>의 마지막 장면이 자꾸 잊히질 않아요. 그 남자가 미쓰비씨 백화점 옥상에서 말하잖아요, 날자, 날자꾸나, 한번 더 날아보자꾸나

- 일단, 지연씨, 거기서는 내려옵시다, 네?

- 그다음 그 남자는 뛰어내렸을까요? 내 눈에는 그 장면이 그 남자가 뛰어내린 것으로만 읽힌단 말이에요.     


철훈은 지연 몰래 읽었던 <날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 날자, 날자꾸나, 한번 더 날아보자꾸나- 그 남자는 분명히 그렇게 독백을 했다. 그게 대체 왜 그렇게 읽혔다는 거야! 철훈의 눈에 그 남자가 우울해 보이긴 했어도, 당장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 날개를 달고 나는 거면 떨어져 죽는 게 아니라, 날아오르는 거 아닌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새인데, 오, 그렇지-!

머릿속이 불현듯 환해졌다. 아니, 아니다. 그 남자는 뛰어내린게 아니다!     


- 그 남자가 뛰어내리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뛰어내리는게 아니라, 아 그러니까,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겁니다!

-...?

-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중인거라니까요! 

    

지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를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난간에서 내려올 생각도 없어 보였다. 철훈은 다급해졌다. 정민도 출근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허공에 있는 지연의 두 발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해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어떡해, 어떡해- 정민은 철훈의 등을 마구 때리며 닦달했다. - 빨리 어떻게 해봐요 좀! 진짜 뛰어내리면 어떡하냐고요!- 철훈은 결정타를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지연이 스스로 난간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 내가 원했던 건 결혼이 아니라 사랑이었나봐요!    

      

지연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또다시 뒤를 돌았다.      


- 똑똑한 사람이 왜 또 이런 건 못 알아듣습니까? 사랑한다고요!     


철훈의 당찬 고백에 정민은 입을 크게 벌려 헉- 소리를 냈다. 당황한 지연의 눈물도 뚝 그쳤다. 지연은 혼란스러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검고 어둡기만 했던 옥상의 전경에서 찬란하게 펼쳐진 불빛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발광하는 민들레 홀씨를 흩뿌려 놓은 듯 도시의 밤은 아름다웠다. 그 광경에 눈이 간질거리고 마음도 간질거렸다. 셰프의 음식을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과 충만함이 연신 온몸을 두드렸다.      


- 나 이제 가까이 가도 되죠? - 철훈이 묻자 지연은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훈은 난간으로 뛰어가 지연이 내려오도록 부축했다. 지연은 민망했는지 철훈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단단한 두 바닥을 딛은 지연에게 철훈은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 지연씨가 얼마나 글을 사랑하는지 아는데요, 근데 난 그만큼 지연씨를 사랑하는 것 같거든요  

   

처음 받아보는 절절한 사랑 고백에 지연은 어색하게 눈을 도로록 굴렸다. 마음이 자꾸 울렁거렸다. 좋은 건지, 미안한 건지, 불안한 건지, 행복한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에 지연은 사랑과 비슷한 어떤 감정이 샘솟고 있는 중이리라 생각했다. 철훈은 지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 이제 알겠어요. 난 지연씨한테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난 앞으로 지연씨가 살고 싶게 만들 겁니다.  

   

지연의 마음이 연신 두근거렸다. 사랑이 살아갈 이유가 될 수 있구나. 단지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서 살아갈 명분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진심이 가득한 철훈의 눈을 보니 삶에 미련이 생겼다. 죽을 이유만을 고민하던 지연은 살아야 할 새로운 이유를 찾았다. 철훈의 뒤로는 서울의 야경이 반짝이는 실크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연은 철훈의 눈을 보고 말했다.     

 

- 세상에 이렇게 빛들이 가득한데도, 철훈씨는 내 눈에 항상 잘 보여요     


그 말이 참 지연답다고 느낀 철훈은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정민은 멀찍이서 철훈과 지연을 보고 다행스러운 한숨을 내쉬고선 더블에스 편의점으로 향했다.     


*     


<장독대의 된장이 다 떨어질 때까지요>     


어젯밤에 받은 셰프의 쪽지가 정민의 눈앞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그 장독대는 어딨다는 건데, 얼마나 남았다는 건데- 정민은 계속 불안했다. 끝이라는 말이 처음 피부로 와닿았다. 이제 나를 위로했던 그 식단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철훈, 지연과의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도, 다시 공예에 뛰어들게 했던 셰프와의 관계도 그 된장이 떨어지는 날 끝이 난다.    

  

어느덧 새벽 여섯시였다. 점장은 평소보다 빨리 출근했다. 정민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점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민은 누군가의 담배와 야식을 계산하는 와중에도, 과자를 진열하는 와중에도 돌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 왜 이렇게 한숨을 쉬어대? - 점장이 정민에게 의아하다는 듯 묻자 정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제 점검을 하면서도 산란한 마음에 정민은 숫자가 계산되지 않아 한참 포스기를 두들겼다. 지금쯤이면 셰프가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내가 지금 집에 있었다면 셰프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셰프를 만나서, 지금 가방에 고이 모셔놓은 식탁보를 전해줄 수 있을 텐데. - 그래서 장독대는 어디 있는데요, 그래서 된장은 얼마나 남았는데요! - 셰프에게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정민은 저 멀리서 음료수를 진열하고 있던 점장에게 말했다. - 정말 죄송한데, 오늘만 조기 퇴근 할게요! - 정민은 그렇게 퇴근하기 두시간 전 먼저 편의점을 나와버린 것이다. 

    

- 어엇, 야, 정민이, 너 어디가!     


뒤에서 점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것 같았지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동지에서 입동으로, 정민은 따뜻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나 지금 화락맨션 가는 중이에요. 좋은 시간 보내고 있으면 미안한데 철훈씨랑 지연씨 약속대로 나 좀 도와줘요>     


정민은 지하철에서 단톡방에 톡을 보내 지연와 철훈을 호출했다. 같은 시간, 지연은 태어나 처음으로 철훈의 오토바이를 타고 한강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철훈의 허리를 생명줄 잡듯 꾹 껴안고 지연은 연신 꺄악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 이게 내 평생 했던 일 중에 가장 미친 짓이에요! - 지연의 말을 뚫고 철훈의 폰에서 정민이 특별히 설정해 둔 단톡방 알림 소리와 강력한 진동이 느껴졌다. 철훈은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톡을 확인했다. - 아, 분위기 좋았는데! – 아쉬움을 뒤로하고 철훈은 화락맨션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돌려 악셀을 밟았다.      


끼익- 


화락맨션의 거대한 철문을 열고 철훈과 지연은 건물로 뛰쳐 들어갔다. 3층까지 계단을 오른 그 순간, 어두운 실루엣의 사람 하나가 302호에서 나왔다.

- 어엇! 셰프다! - 철훈이 소리쳤고 지연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지금 정민씨 방에서 나와서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어요! 셰프 같아요!

- 오케이, 나 지금 거의 다 왔어요!     


정민은 정신없이 뛰었다. 너무 세게 내달려서 겨울의 추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뛰었다. 그 와중에도 소중한 식탁보가 들어있는 가방은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다다른 화락맨션에서 정민은 지하로 내려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 사람이 틀림 없다. - 나 완전 불 붙었어! - 정민은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셰프를 뒤쫓아 온 철훈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정민을 쫓아가며 - 원래 저렇게 빠른 사람이에요? - 지연에게 물었지만 운동을 한 지 까마득했던 지연은 아직 2층 계단 언저리에서 애를 먹는 중이었다.     


- 제발 거기 서요!          

탁탁탁탁-          


- 해코지 안 할게요!           

탁탁탁탁-          


- 얼굴만 좀 보자고요!     


셰프는 정민을 피해 지하로 뛰어 내려갔다. 지하 2층에 장독대를 놓은 창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셰프 밖에 모를 것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깊은 곳. 셰프는 장독대 뒤로 들어가 숨었다. 어둠에 시야가 차단된 정민은 지하의 복도 한가운데에서 서성였다.     


- 여기, 분명히 여기로 내려갔는데…   

       

겨우 정민을 뒤따라온 철훈은 어두운 지하로 내려간 정민의 등에다 대고 헉헉거리며 말했다.  

   

- 그냥 오늘은 포기합시다! 너무 어두워서 위험해요!

- 셰프가 분명히 여기 어디 있단 말이에요, 철훈씨도 봤잖아요!  

   

지하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철훈은 혹시라도 있을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때 복도 멀리서 무언가 번쩍 빛났다. 동그란 두 빛이 철훈에게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 아이 깜짝이야!     


페라리의 눈이었다. 철훈은 긴장이 풀려 금세 페라리에게 반가운 말투로 -너 왜 여깄어? 여기 자주 와? 언제부터 왔어?- 세 살 배기 딸에게 낼 것 같은 목소리로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페라리는 철훈을 향해 가르릉 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철훈이 페라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페라리는 재빨리 손을 피해 몸을 180도 돌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른한 동작으로 철훈과 멀어졌다. 멀리 있는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창고 안의 셰프는 감지했다. 페라리가 쳐다보는 건 셰프였다. 정확히는 항상 푸짐하게 먹을 것을 주던 셰프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셰프는 페라리를 떨쳐내기 위해 소리없이 입모양으로 연신 -저리가!- -간식 없어!-를 소리없이 외치며 훠이 손을 내저었다.     

페라리는 미지의 간식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셰프가 서있는 장독대 창고를 향해.     

세 발자국, 네 발자국.

성큼 성큼-      


정민은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채고 천천히 페라리를 따라갔다. 

페라리는 기어코 창고 앞에서 멈춰섰다.


야옹 야옹-

페라리는 어둠을 향해 반갑게 울어댔다.

결국 어둠 속에서 사람 형상 하나가 나타났고, 

탁- 소리와 함께 작은 전등이 켜졌다.        


셰프다, 내가 그토록 찾던 나의 셰프다. 얼굴을 확인한 정민은 숨이 멎는 듯했다.    

      

- 안녕하세요          


이미 복도에서 수도 없이 주고받은 인사였다.

301호의 성희는 여느 때처럼 짧은 머리를 넘기며 정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특유의 시원한 웃음 대신 어색한 웃음을 짓고서.     


- 그쪽일 리 없어요. 301호 아니잖아요

- …

-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정민은 충격에 빠졌다. 분명히 음식에서 느껴진 건 301호가 아니었는데. 301호처럼 애살있고, 넓고 얕은 사랑에 익숙한 맛이 아니었는데. 그 맛은 독불장군의 고집과 진심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상 밝았던 성희에게서는 고뇌와 고집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삭혀낸 아픔도, 끈질긴 인내도 보이지 않았다. 성희를 떠올리면 그 사람 좋은 웃음만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 정민씨,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나라는 거.     


먹는 사람이 늘어난 것을 알고 있었던 것도, 연포탕을 쏟은 날 대문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전 301호 쪽이 소란스러웠던 것도, - 오, 팔찌 이쁘다. 손재주 좋네요 - 그 팔찌를 정민이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정민의 늦은 아침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아침에 일한다고 했던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민이 애써 외면했던 단서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셰프는 나에요. 내가 정민씨 셰프에요.     


중요한 건 ‘그래 보인다’는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야.

정민의 아버지처럼 성희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셰프라는 사실은, 그렇게 보이는게 아니라 그런 것이라고. 그렇다고 믿으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정민은 눈물이 그렁그렁해 한참을 씩씩거렸다. 난 왜 그 천금같은 말을 잊고 살았을까. 301호를 가리키는 모든 단서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화가 나고 창피해서 끝내 눈물이 떨어졌다. 정민은 성큼성큼 전등이 비추는 장독대 앞으로 가서 뚜껑을 차례로 열었다. 간장, 아니고, 고추장, 도 아니고, 그래 이게 된장이겠다. 세번째 장독대에는 된장이 아직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평생 먹고도 남겠네!     


정민은 안도감에 털썩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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