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식구의 탄생>
2월 중순이 되자 추위가 잦아들고 있었다. 정민의 퇴근길이었다. 입동역에서 화락맨션까지 걸어오는 내내 정민은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느릿느릿 초끈을 꼬았다. 정민은 남은 초끈으로 자신이 쓸 팔찌를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요즘 303호쪽 벽에서는 쿵쿵 거리는 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았다. 지연의 기행이 요 며칠새 많이 줄어든 것이었다. 철훈의 덕이 컸지만 지연에게 어느새 정이 든 정민은 지연이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어엇- 짐짓 엄한 소리를 내며 손으로 막았다. 지연은 손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정민의 눈치를 봤다. 조용하고 낯을 가리는 지연이지만 함께 밥을 먹을 시간을 매일매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지연에게 식사하자는 말을 더 일찍하지 못한게 미안할 정도였다.
화락맨션에 다다르자 주인 아저씨는 마당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정민을 보더니 습관처럼 물었다. -별일 없지?- 정민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요즘 잘 먹고 다니나 보다, 정민이 얼굴이 좋네
정민은 잘못한 일을 들킨 듯 –잘먹긴요, 부은 거예요,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삐걱거리는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연다. 오늘의 메인메뉴는 간장 양념이 잘 스며든 소불고기였다. 정민은 철훈과 지연이 있는 톡방에 알림을 보냈다.
<오늘 메뉴는 소불고기. 1분 안에 텨와요 다들>
<옙>
<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훈과 지연이 문을 두드렸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서 셋은 서둘러 식사 준비를 했다. 정민은 오늘도 새벽 두시에 소비기한이 끝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을 매일 먹다 보니 정민에게는 생김치보다는 잘게 다진 볶음김치가, 갓 구운 계란후라이보다는 기계가 말아낸 계란말이가, 구운 김보다는 조미김이 익숙했다. 그건 괜시리 모조품같았다. 김치의 모조품, 김의 모조품, 계란의 모조품. 그러므로 그들이 모조한 원형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고 정민은 그것을 평생 맛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셰프의 음식은 각 재료의 원형을 잘 구현해 냈다. 소불고기와 삼색채 무침에서는 원재료의 맛이 입안에서 오래 감돌았다. 소 양지머리의 담백한 기름맛, 양파의 감칠맛과 달달함, 시금치의 향긋한 흙냄새와 달큰함, 콩나물의 고소한 물맛, 고사리의 부담없는 구수함. 탄생의 순간부터 내장된 맛의 원형. 기본과 토대를 이루는 맛들의 정직한 결정체였다.
정신없이 소불고기를 입에 넣던 철훈은 계속 울리는 폰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느려? 나 섭섭해지려고 해>
혜미의 카톡이었다. <오빠 출근하기 전에 잠깐 볼래?> <저녁 같이 먹구 싶어서 그래> <오늘 따끈한 국물이 땡기는데> ... 쌓여있는 혜미의 톡에 하나의 톡이 더 쌓였다. 철훈이 얄미얄미 밥숟가락 끝을 이로 긁으며 한동안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지연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철훈을 쳐다봤다. 당황한 철훈의 마음속에서 소리들이 아우성쳤다. 그냥 거짓말로 둘러대? 아님 솔직해져야 하나? 난 거짓말을 못하는데! 젠장 뭐라고 대답해? 그러다 철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아, 별거 아닙니다.
철훈은 톡 알림을 껐다. 그 동그랗고 차분한 눈은 항상 철훈은 무력화시켰다. 정민은 철훈의 옆 바닥에 놓인 책의 중간 즈음이 접혀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 생각보다 잘 읽네요, 그 책
- 나 이거 세번째 읽는 겁니다
- 오
- 내가 그랬잖아요, 나 원래 공부 잘했었다니까요.
- 이러다 철훈씨도 대학원 가겠는데요?
정민의 장난스런 말에 지연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죄는 짓지 않을게요- 철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 어엇? 그거 대학원생 무시 발언인데? 빨리 반성 해요 - 지연은 철훈의 악의없는 꾸지람에 작게 웃었다.
지연은 셰프의 음식이 뱃속에 들어올 때마다 노화되었던 정신이 다시 힘을 얻는 느낌을 받았다. 각로하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는 감각. 오늘도 그랬다. 소불고기와 쌈채소는 든든한 위장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고, 신선한 삼색채 무침은 스트레스로 더럽혀진 몸속의 곳곳을 쾌청하게 청소해 주었다. 머리가 젊어진 듯한 느낌에 지연은 마음을 다잡고 논문을 쓰기로 다짐했다.
물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지연의 논문은 지지부진했다. 그 스트레스에 지연은 여전히 매일 밤 손톱을 피나도록 물어뜯고 마구 손등을 긁고 머리를 찧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야 했다. 금세 지연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졌다. 도저히 완성되지 않는 글과 해결되지 않는 가난, 바닥을 치는 자존감과 끝나지 않는 우울을 안고 살아가려면 삶에 더 큰 미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먹는 것으로만은 충족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삶도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명확한 이유가 필요했다.
*
-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네요. 주인공은 싱클레어인거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동창인데 좀 천재같은 비범한 놈인거고,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을 짝사랑하게 되는거고. 전쟁이 일어나고...
식사를 끝낸 지연과 철훈은 맨션 주변을 걸으며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 근데 싱클레어가 짝사랑하는 에바 부인이 데미안 엄마잖아요. 이거 완전 막장 아닙니까? 어떻게 짝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친구 엄마를 짝사랑해요?
- 그건… 데미안에 대한 동경심이 투영된게 아닐까요?
- 그럼 주인공이 싱클레어인데 제목은 왜 데미안이에요? 제목을 싱클레어라고 해야지!
지연은 열변을 토하는 철훈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철훈은 지연과 만나며 혜미와 연락을 주고받는 이 상황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결국 철훈은 고백하듯 운을 띄웠다.
- 얼마 전에 편의점 알바로 정민씨 대타를 뛰었는데 혜미를 만났어요
지연은 괜히 속이 불편했다. 철훈이 예전에 말했던 전 여자친구라는 사람 같았다. 데미안을 읽게 된 계기도 그 친구 때문이지 않았나. 철훈이 혜미와 다시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는 걸까, 철훈이 혜미와 다시 만나도 여전히 나를 찾아줄까. 나와 소설을 읽고, 헤세를 얘기하고, 실존적 삶에 대해 이야기해 줄까. 철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혜미한테 딴 남자가 생겼다네요. 화가 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나더라고요. 암튼, 뭐, 그렇다고요.
철훈은 또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했다. 지연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철훈의 말을 듣고 묘한 승리감과 안도감이 들었다. 세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승리감이라니! 스물 여덟, 사춘기는 한참 지난 나이에 처음 느껴보는 사춘기스러운 감정이었다. 철훈은 지연에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면서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 정민씨가 지연씨한테 그날 괜히 그런게 아니긴 해요. 나도 그 음식들에서 진짜로 지연씨가 느껴지니까
- 그 음식들이 어떤데요?
- 뛰어나고, 훌륭하고, 따뜻해요. 일하고 있을 때 계속 생각나고. 힘들고 피곤할 때도 생각나고.
- 정민씨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요?
철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하게 되묻는 지연을 보고 심장이 연신 두근거렸다. 마음 속에서 나오려고 아우성인 말들을 꺼내놓고 싶었다. 이걸 말해, 말아? 이걸 말해? 에라, 말해 버리자- 철훈은 나름 진지한 고백이랍시고 지연에게 눈을 고정하고 말했다.
- 내 생각에는 말입니다, 싱클레어가 사랑한 건 에바 부인이 아니라 데미안이었을 겁니다. 내가 싱클레어처럼 사춘기를 씨게 겪어봐서 잘 알아요.
지연은 철훈의 말을 듣고 -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싱클레어의 마음 속에는 항상 데미안이 살아있었던 것 같고, 그게 단순한 동경을 뛰어넘어 사랑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 홀로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날 밤 철훈은 혜미와 만나 관계를 정리했다. 철훈은 펑펑 아이처럼 우는 혜미를 달래며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내가 성급했고, 내가 원했던 건 결혼이 아니었다고. 나 같은 놈을 믿어줬던 그동안의 너에게 참 고맙고 미안하다고. 그런 철훈에게 혜미는 번진 눈화장을 닦으며 물었다. - 그럼, 난 오빠같은 사람 말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해? - 그러게, 어떤 사람을 만나야 네가 행복할 수 있을까. 철훈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을 꺼내놓았다.
- 널 위해 어떤 책이든 기꺼이 읽을 사람
*
다음날 저녁, 정민은 출근 전 세 시간부터 방바닥에 앉아 식탁보를 위한 매듭을 지었다. 매듭을 지으면서 사라진 목걸이와 팔찌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 출근 전 방안에 두고 간 목걸이와 팔찌를 셰프가 가져간 것 같았다. 지금 정민이 새롭게 만들고 있는 식탁보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셰프를 위한 식탁보는 셰프의 음식만큼 섬세하고 공들인 작품이어야 했다.
띠링 -
어느새 출근 시간을 알리는 알람소리에 정민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식탁보를 내려놓고 출근 준비를 했다. 301호에서는 여느 때처럼 떠들썩한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또 친구들과 모임을 하는 건지 하하호호 화목한 소리들이 벽을 타고 넘어왔다. 이제 정민은 그런 소란에도 예전처럼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 둘이나 생겼기 때문이다.
정민은 9시 반이 되자 새로 만든 팔찌를 차고서 문밖으로 나섰다. 평소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던 정민은 괜히 팔찌가 느껴지는게 어색해 계속 팔목을 어루만졌다.
- 안녕하세요!
- 아, 안,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복도로 나온 301호의 그 여자였다. 정민은 시원시원한 웃음을 장착한 그 반가운 인사에 놀라 말을 더듬으며 화답했다. 정민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 여자는 정민의 팔목에서 빼꼼 나온 팔찌를 보고 말을 걸었다.
- 오, 팔찌 이쁘다. 손재주 좋네요
- 아, 이거요?
- 근데 혹시, 저희 너무 시끄럽나요? 친구들이랑 모임할 때마다 너무 시끄럽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여쭤보네요, 죄송해요
- 괜찮아요. 저는 어차피 밤에 출근해서 집에 없거든요
- 아 그래요? 와, 새벽 내내 하시는 거예요? 체력 좋으시다!
역시 화락맨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법이었다. 대체 어느 화락맨션 사람이 이렇게 칭찬에 후하겠어.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짓는 미안하다는 표정도 화락맨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정민은 속으로 생각하며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301호는 정민의 팔을 친근하게 툭툭 치며 말했다.
- 그래도 너무 시끄러우면 언제든 편히 얘기해주세요, 보니까 303호 문에 쪽지 붙이셨던 것 같은데, 너무 시끄럽다 싶으면 제 방문에도 그렇게 편하게 붙여주시구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침마다 정민은 철훈, 지연과 밥을 먹으며 비슷한 데시벨의 소음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정민은 오히려 - 제가 아침에 시끄럽지 않나요? 잠을 깨운 거라면 죄송해요 - 사과를 했지만 301호는 또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괜찮아요, 전 아침에 일하거든요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 밝음이 어디서 나왔겠어. 정민은 -다행이네요- 짧게 대답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
새벽부터 셰프는 간장을 좋아하는 정민을 위해 마늘 간장으로 양념한 LA갈비를 만들고 있었다. 요새 정민에게 새로운 식사메이트가 생긴 듯했다. 302호 부엌의 휑한 그릇 선반에는 처음 보는 밥그릇이 두 개나 더 보였고, 아침마다 정민의 방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었다. 늘어난 빈그릇은 곧 셰프의 고집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일 테다. - 난 죽어도 이 일을 해야겠다 - 벅차오르는 감정에 셰프는 늘어난 사람 수에 맞게 음식의 양을 늘렸다.
셰프는 냉장고 문을 열고 미리 칼집을 내서 손질해 놓은 소고기를 꺼냈다. 그러다 냉장고 한가운데 붙여 놓은 쪽지가 눈에 들어오자 표정이 시무룩하게 굳고 말았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밥 해주는 거 그만할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줘요.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니까>
셰프는 정민의 쪽지에 대한 답을 아직 고민 중이었다.
일주일만 더 할게요, 아니 한 달만 더 할게요, 아니, 굳이 정해놓아야 하나요? 힘닿는 데까지 해볼게요.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사실 퇴직금도 거의 떨어져갔고, 정민에게 앞으로 계속 정체를 숨기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욕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들을 써먹지 않으면 심연같은 우울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정민 덕분에 셰프는 자신의 음식을 매일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진짜였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지난 연포탕 사건을 겪고 셰프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문이 잠기지 않은 302호 안에 정민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정체가 들통날게 무서워 손에서 돌연 힘이 풀려 버렸다. 그렇게 월동무를 숭덩숭덩 잘라 넣어 끓인 시원달달한 연포탕은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내가 누군지를 알고서도 정민씨가 계속 밥을 먹어줄까? 아직 해줄게 많이 남은 셰프에게도, 아직 받아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정민에게도 아직은 서로를 밝히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다.
셰프는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그 된장의 장독대를 생각했다. 셰프가 한식에 몰두하게 만들고, 셰프에게 시간의 축복을 가르쳐준, 그래서 지금 정민을 위해 매일 새벽 집밥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된장의 장독대를 생각했다. - 그 장독대의 된장이 다 떨어지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 셰프가 상상할 수 있는 끝이란 빈 장독대였다. 셰프는 천천히 쪽지에 타이핑을 했다.
<장독대의 된장이 다 떨어질 때까지만 할게요>
내가 감히 끝을 예고할 수 있을까.
시작도 내가 한 게 아니었던 것을.